아시아 작곡가 최초 라디오 프랑스 프레장스 페스티벌 주인공
프랑스 연금개혁 반대파업으로 '알라라프' 세계 초연은 무산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예술에는 베테랑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창작에는 완성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세계적인 무대에서 수없이 많이 자신의 곡을 선보였을 작곡가 진은숙(62)은 신작의 초연(初演)을 "고문"에 비유하면서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때 어깨를 살짝 떨었다.
현대음악의 대가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진은숙은 신작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수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망신당하는 게 아닌가 공포감이 심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아시아 작곡가 최초로 프랑스 공영방송 라디오 프랑스가 주최하는 현대 음악 축제 '프레장스 페스티벌' 주인공으로 선정된 진은숙을 지난 9일(현지시간) 만났다.
진은숙은 올해로 33회를 맞은 이번 축제에서 20세기 후반 이후 작곡가를 선정해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작곡가의 초상' 프로그램의 '얼굴'이었다.
그는 2월 7일부터 12일까지 파리에 있는 라디오 프랑스 사옥 '메종드라라디오' 등에서 엿새간 이어진 페스티벌의 모든 프로그램을 꼼꼼하게 기획했다.
"프랑스에서도 활동을 많이 했는데, 프레장스 페스티벌 상주 작곡가로 초대받았다는 것은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이랄까요. 짧은 기간에 아주 많은 작품을, 그것도 수준 높은 연주 단체와 함께한다는 것은 특권을 누리는 일이죠."
이번 공연에서 프랑스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유럽에서 명망 높은 프랑스 현대음악 연주단체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등이 진은숙의 작품을 연주했다.
진은숙은 프랑스 관객들과 만남을 준비하면서 지난 2020년 20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바이올린 협주곡 '정적의 파편' 프랑스 초연 무대를 꾸미는 데 특히 힘을 줬다고 소개했다.
라디오 프랑스 사옥 내 공연장에서 열리는 다른 공연과 달리 이 곡을 연주하는 공연은 유일하게 클래식 전문 대형 콘서트홀인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개최했다.
진은숙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의 영감을 줬다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무대를 꾸몄다.
"음향이 굉장히 좋은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카바코스의 연주를, 그것도 밀접한 작업을 굉장히 많이 한 지휘자와 같이한다는 상황 자체가 '더 베스트'죠."
진은숙은 애초 본인의 작품 18곡을 소개할 10번의 공연을 준비했으나,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가 11일 진은숙의 작품 3곡 등을 연주할 예정이던 제6차 공연이 취소됐다.
국립오케스트라 단원 일부가 공연 당일 오전 프랑스 정부가 정년 연장을 골자로 추진하는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시위 참여를 위해 파업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진은숙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작 '알라라프' 세계 초연과 '권두곡' 및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그란 카덴차' 프랑스 초연이 모두 무산됐다.
진은숙과 계약을 맺은 영국 악보 출판사 부지 앤드 호크스는 진은숙의 '알라라프' 세계 초연을 이번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고 표현했었다.
'심장박동의 의식'(Ritus des Herzschlags)이라는 부제가 달린 '알라라프'는 마치 심장 박동처럼 보이는 별빛의 밝기 변화를 나타내는 광도 곡선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진은숙은 부지 앤드 호크스에 "정적인 궁중 음악과 활기찬 민속 음악과 같은 한국 전통 음악의 측면을 담았다"며 "직접 인용하기보다는 압축적이고, 고도로 양식화해 멀리에서 암시했다"고 설명했다.
공연이 취소된 날 찾아간 공연장에서 다시 만난 진은숙은 앞으로 신작 초연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다른 남은 공연을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라디오 프랑스 측에서 5년 전 연락을 받고 준비를 시작한 이번 페스티벌은 진은숙에게 자신의 작품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고 한다.
"프랑스 관객들에게 제가 30년도 전에 만든 작품부터 가장 최근에 만든 작품까지 들려주고 싶었어요. 저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한 세대를 훑어본 셈이죠."
진은숙은 "창의력도 소진이 된다"며 "언제까지 (작곡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한다"며 다양한 음악에서 영감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통영국제음악제(TIMF)를 총지휘하는 예술감독을 맡은 진은숙은 9일 공연에 '한국의 밤'을 마련해 한국 음악가들을 소개하는 자리도 만들었다.
한국 현대음악 연주단체 TIMF 앙상블이 진은숙의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을 연주했고, 대금 연주가 유홍이 작곡가 박선영의 대금 협주곡 '절반의 고요'를 선보였다.
프레장스 페스티벌 마지막 날 공연에서는 '사이렌의 침묵' 개정판을 세계 초연했다. 이 작품은 올해 3월 말∼4월 초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아시아 초연을 한다.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난 진은숙은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1985년부터 3년간 독일 함부르크 음악대학에서 헝가리 출신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의 가르침을 받았다.
2004년 음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로마이어 작곡상을 받았고, 2005년 아놀드 쇤베르크 상, 2010년 피에르 대공 작곡상, 2017년 비후리 시벨리우스 음악상, 2020년 레오니소닝 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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