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에 남은 카드는 '승전'뿐…"협상 아닌 승리에만 초점"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 전쟁에서 최고 영웅으로 떠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자국 안팎에서 정치적 도전에 다시금 직면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2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크라이나 내에서 제기됐던 정부 관료 부패 의혹이나 정치적 라이벌 문제 등이 러시아 침공에 맞서 온 나라가 단합하면서 잠시 가려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코미디언 출신 45세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9년 기성 정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발 속에 결선투표 기준 73%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으나 전쟁 발발 직전에는 신뢰도가 28%(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 여론조사)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인기를 잃었다.
그와 대선에서 겨룬 정치적 라이벌이자 친서방 인사로 평가받는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2021년 말 반역 혐의로 기소되는 등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서방 관리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부패와 싸우겠다는 공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런 와중에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침공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손에 들리는 대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암살조가 대통령궁을 노린다는 보도가 무성할 때 외국 도피를 거부하고 유럽 지도자들에게 "여러분은 지금 내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일 수 있다"며 지원을 촉구하는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수도 키이우가 며칠 만에 함락될 것이라는 서방의 예상은 빗나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내 인기는 치솟았고 정계에서 비판의 목소리는 사그라졌다.
이후 그는 전쟁이 1년간 이어지는 동안 폭음이 이어지는 동부 최전방 부대를 방문하고 미국을 찾아 대대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오는 등 국내외에서 입지를 다져 왔다.
그와 정치 풍자를 함께했던 코스티안틴 페트루셰우스키는 "대통령으로서 그에게 만족하는지 나 자신에게 반문하지 않는다"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젤렌스키와 잘루즈니(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군 총사령관)의 이름으로 종교라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우호적지만, 이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라고 정치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우크라이나가 최근 몇 주간 유력 인사들을 겨냥한 대대적인 부패 단속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젤렌스키 정부는 고위인사 10여 명을 무더기로 부패 혐의로 물갈이했고, 한때 젤렌스키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유력 기업가 이호르 콜로모이스키와 전·현직 고위 공직자를 겨냥해 가택 수색에 나섰다.
경질된 한 고위 인사는 구호물품 운송을 위해 기부된 차량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기업인의 고급차를 몰고 다닌 혐의를 받고, 또 다른 고위 인사는 40만 달러(약 5억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는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비판적인 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초기 뉴스 콘텐츠를 통제하는 등 미디어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면서 권위주의의 조짐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국내 인기가 높고 잠재적인 정치 라이벌인 잘루즈니 총사령관은 매체 인터뷰를 하려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승인이 떨어지는 일이 드물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전방에서 소모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내 정치적 문제는 대외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장 미국에서도 우크라이나를 무한정 지원할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가 꽤 높다.
키이우에 있는 한 서방 외교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애초에 서방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했겠지만, 그 모멘텀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부패 의혹, 정치적 적수, 엉망인 개혁 과정 등 모든 흙먼지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취임 초에는 한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되어 가면서 점점 강경 노선으로 돌아서 '승전' 카드만 쥐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1년이 다 돼 가는 전쟁에 지쳐 있으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입장은 더 강경해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지난해 9월 러시아가 점령한 4개 지역에 대한 강제 병합을 선언한 것을 계기로 변화가 두드러졌으며, 수많은 국민과 병사들을 잃으면서 젤렌스키의 승전 의지가 더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 바로 전날까지도 "오늘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침묵이었다"라고 말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러시아 대통령과는 평화 협상은 불가능하다"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임기 중 시련은 사람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가 더 강경해졌나? 그렇다. 그가 더 강해졌나? 내가 볼 때 그는 언제나 강했다"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제 수뇌부나 참모진과 논의할 때 '러시아 정부와 어떻게 합의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전장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그는 개인적으로, 진실로 믿고 있는 승리로 나라를 이끌고 있다"라며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이고 그에게 그 중간은 없다"고 말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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