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 사찰 유적서 북조시대 전래한 불교 유물 나와"
中고고학계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 기존 주장 되풀이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고고학계가 발해(698~926년)의 도읍이었던 팔련성(八連城) 사찰 유적지에서 중원의 영향을 받은 불교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며 "중국의 통일 다민족 국가 형성 과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며 한국의 고대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지린성 고고연구소는 지난 24일 소셜미디어 웨이신 공식 계정을 통해 "발해의 도읍 팔련성이 있던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 싼자쯔향 구청(古城)촌 절터 유적지 6천㎡에서 2개의 사찰 유적과 부처 조각상, 기와 등 1만6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팔련성은 발해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있었던 곳으로, 785년께부터 약 10년 동안 발해의 수도였다.
이 연구소는 "1호 사찰은 중국에서 발굴한 최초의 고구려 사찰이자,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절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찰은 5세기에 창건됐다 발해 말기에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며 "발굴한 기와에 '임자년(任子年) 6월 제작'이라고 새겨져 있어 사찰 건립 시기 등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출토된 부처 조각상 등의 유물은 북조시대 후기의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중원의 불교가 동북 변방 지역에 전래한 과정과 영향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소는 2호 사찰은 우물과 온돌 터가 있고, 퇴적층이 5층으로 이뤄졌다며 발해의 '고급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동서 120m, 남북 80m 규모의 이 사찰 터에서 출토된 돌로 만든 함에서는 비단에 싸인 금과 은, 주석, 유리 등 3천500여점의 유물과 7개의 사리로 추정되는 '은구슬'이 나왔다.
2호 사찰은 발해 초기 창건돼 중·말기에 중건됐다 발해 말기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 연구소는 "1호 사찰 유적은 두만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발굴의 공백기를 메웠고, 2호 사찰 터는 발해 초기와 중기, 말기 유적을 아우르고 있어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 일대 고고학적 연대기를 보완, 기술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평가했다.
이어 "불교 관련 유물의 형상은 중원의 불교가 이 지역으로 전래해 발전한 역사적인 사실을 확실하게 반영하며, 중국의 통일 다민족 국가 형성 과정을 실증한다"며 "이번 발굴은 국가의 역사와 문화 안보를 수호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소는 2016년부터 작년까지 구청촌 사찰 유적지를 발굴해왔다.
중국 고고학계는 구청촌 발굴을 작년 중국의 '10대 고고학 신발견' 22개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했다.
지린성과 옌볜자치주 박물관은 발해에 대해 '말갈족이 주체가 돼 건립한 당나라 시대의 지방정권'이라며 '200여년의 민족융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발해가 당나라 문화를 전면적으로 배우는 기초 위에서 비교적 완비된 정치제도를 만들었다'라거나 '발해 도시는 구조·기능, 건축양식 등이 모두 중원 도시의 복제품'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은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통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허베이성 산하이관(山海關)이라던 종전 입장을 번복, 자신들이 고구려의 성이라고 인정했던 단둥의 압록강 변에 있는 박작성을 '만리장성 동단(東端)'으로 수정했다.
중국 국가박물관은 지난해 한중 수교 30주년과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동방길금(동방의 상서로운 금속) -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을 열면서 고구려·발해를 제외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했다가 우리 당국이 항의하자 철거하기도 했다.
p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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