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최대 강제징용 기록보관소장 "전범책임 자인해야"

입력 2023-03-30 07:07  

[인터뷰] 세계최대 강제징용 기록보관소장 "전범책임 자인해야"
"일본이 강제징용 책임 자인 않더라도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게 중요"
"강제징용자 건강보험기록, 배상받는 데 유용"

(베를린=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가해자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자인하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이고, 매우 중요합니다."


강제징용을 비롯해 독일 나치 정권의 1933∼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범죄와 관련한 세계 최대 기록보관소인 아롤센 아카이브의 플로리안 아줄레이 소장은 2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 2016년 취임한 그는 2차대전 당시 나치 정권의 강제·집단학살 수용소 희생자나 생존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가족이나 친지를 만났을 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겪은 피해에 대한 인정이었다고 강조했다.
가해자가 책임을 자인하고, 가족과 친지 등 주변인들이 피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깊은 정신적 외상에서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일간에 현안이 되고 있는 강제징용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했다.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한 책임을 자인하지 않더라도 강제징용 피해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게 중요합니다. 침묵보다 끔찍한 것은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야기하며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프랑스인인 아줄레이 소장은 "2차대전 당시 전쟁범죄와 관련해 가해자인 독일을 특징짓는 것은 실제로 과거사를 책임지는 직시가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독일에서는 각지의 학생들이 우리 지역에서, 내가 사는 거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고 기록하면서 역사와 정치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중부의 소도시 바트 아롤센에 있는 기록보관소에는 독일 나치 정권의 강제·집단학살·게토·게슈타포 수용소 기록과 독일과 독일점령지로의 강제징용 기록, 전쟁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주 기록 등 3천 만건의 원본 문서가 보존돼 있다. 이들 문서에는 나치정권의 전쟁범죄로 인한 희생자와 생존자 1천750만명이 겪은 간난신고가 담겨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행방불명자를 추적하기 위해 1946년 연합군이 만든 국제위원회인 국제추적서비스(ITS)를 전신으로 한 이 기록보관소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아줄레이 소장은 "아직도 아롤센 아카이브에는 나치 전범 희생자나 이제 고인이 된 생존자 유족들이 연간 2만건에 가깝게 희생자와 생존자의 기록에 대해 문의하고 있다"면서 "이는 해당 희생자에 대한 기록으로 또다시 보관되게 된다. 기록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계속 성장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방대한 기록도 실제로 일어난 피해를 다 반영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규모로 나치 정권 희생자들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 기록도 없는 희생자가 아주 많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가족이나 친지가 우리에게 한 문의가 유일한 발자취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기록이지요."
이들 기록은 1950년대에는 독일 나치 정권의 강제·집단학살·게토·게슈타포 수용소 희생자 내지 생존자, 1990∼2000년대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독일 정부로부터 배상받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아롤센 아카이브가 독일 관청 등 공공기관과 보험사, 기업에서 확보한 강제징용 관련 기록은 2차대전 기간 카드식 목록만 420만건에 달한다. 지역별로 분류된 명부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많이 늘어난다.
아줄레이 소장은 "배상받을 때 가장 유용했던 것은 건강보험 기록"이라며 "건강보험 기록을 보면, 당사자의 강제징용지가 바뀌었더라도 연대별로 기록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권전문가로 유럽민주제도인권사무소의 관용·반차별 담당국을 이끌던 아줄레이 소장은 2016년 바트 아롤센 아카이브 소장으로 취임한 뒤 이들 기록이 전 세계 이용자들에 공개되는데 주력했다.
기록의 대부분을 온라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한 결과, 연간 100만명이 기록보관소를 찾게 됐다.


아카이브 이용자가 아카이브에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사람 한사람의 운명을 데이터베이스에 기입해 디지털 기념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는 '모든 이름은 중요하다(Every name counts)' 캠페인, 아카이브가 보유한 옛 강제·집단학살 수용소 수감자들의 개인 물건을 그 후손에게 되돌려주는 '도둑맞은 기억(stolen memory)' 캠페인 등도 기록보관소가 더욱 널리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아줄레이 소장은 '도둑맞은 기억' 캠페인의 의미를 '세대 간 대화와 연대'라고 풀이했다.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던 할머니가 보유했던 시계 등을 손주나 손녀 세대에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세대 간 대화가 이뤄집니다. 피해자의 희생을 인정하고, 그 용기와 회복력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이에 대한 연대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치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거죠."
yulsid@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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