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 잠입시도 러 스파이, 13년간 가짜신분으로 브라질인 행세

입력 2023-03-30 17:04  

ICC 잠입시도 러 스파이, 13년간 가짜신분으로 브라질인 행세
2018년에는 미 최고명문 대학원 진학해 워싱턴서 첩보활동
WP "러, 서방에 불법 공작원 심으려 강박적 노력 기울여"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러시아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 중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작년 4월 잠입을 시도했던 러시아 스파이는 그전까지 무려 13년 동안이나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러시아인이면서도 독일계 브라질인으로 위장해 해외첩보 활동을 벌였고, 2018년에는 미국 최고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존스 홉킨스대 대학원에 들어가 이후 2년여간 미 정계 동향을 수집해 왔다는 것이다.
29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러시아군 정보기관 총정찰국(GRU) 요원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체르카소프(38)는 작년 3월 ICC 인턴십을 위한 보안검사에 합격, '견습 애널리스트' 직위를 획득했다.
'빅토르 뮬러 페헤이라'라는 가명을 쓰던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 정글 모처에 사용하던 컴퓨터 등을 은닉한 뒤 같은달 31일 ICC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ICC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 등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현장 조사를 실시하는 등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 연방수사국(FBI)으로부터 체르카소프의 정체를 경고받은 네덜란드 당국은 체르카소프를 즉각 체포해 브라질로 송환했다. 체르카소프는 이후 가짜 신분증 위조 등 혐의로 15년형이 선고돼 복역 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체르카소프가 마약밀매로 지명수배된 범죄자일 뿐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즉각 송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체르카소프도 악명 높은 러시아 교도소에서 더 긴 시간 복역하게 되는데도, 이런 러시아 정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며 본국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말하고 있다.



WP는 체르카소프가 브라질인 청년 '페헤이라'로 살아 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러시아 정보당국이 서방에 '흑색요원'으로 불리는 불법 공작원을 심으려고 들이는 거의 강박적인 노력을 볼 수 있다고 했다.
GRU는 체르카소프가 브라질에 도착하기 1년 전인 2009년에 이미 현지에서 거짓 출생증명서와 운전면허증 등을 발급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고, 그가 어떻게 태어나서 살아왔는지와 관련한 복잡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꾸며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국으로 떠나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성장한 뒤 고국 브라질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정작 문서상 어머니로 기록된 브라질 여성은 1993년 숨질 때까지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브라질 당국이 압수한 체르카소프의 컴퓨터에서는 GRU 상급자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등은 물론, 리우데자네이루 다리 근처의 생선 냄새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되새기는 등 연기를 연습한 흔적이 발견됐다.
체르카소프는 한동안 GRU의 브라질 내 첩보활동 근거지로 의심되는 관광업체에서 일했고,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대학 학사학위를 딴 뒤 미국 워싱턴 소재 대학원에 지원, 2018년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성공했다.
금발과 어색한 억양 탓에 러시아어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 동급생에게 의심을 사기도 했으나 체르카소프는 이후 2년간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은 채 미국 정부 당국자들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WP는 빈곤가정 출신이라는 학생이 장학금도 없이 2년간 11만9천 달러(약 1억5천만원)에 이르는 학비를 선뜻 내는데도 학교 측은 이를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체르카소프는 2020년 1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미국 체류가 힘들어져 브라질로 돌아왔지만 이후에도 기존 인맥을 이용해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우크라이나측에 미국의 군사개입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신호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등 첩보를 꾸준히 입수,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을 계기로 서방 각국이 러시아 공작원 색출에 나서면서 그런 그도 결국 꼬리를 잡혔다.
체르카소프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은 그를 위해 ICC 인턴십 추천서를 써줬던 존스 홉킨스 대학의 유진 핀켈 교수일 것이라고 WP는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핀켈 교수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는 이전에도 러시아 정보기관을 싫어할 이유가 있었지만, 이젠 거의 폭발할 지경"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브라질 대법원은 최근 러시아의 송환 요청을 잠정 승인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내달 브라질을 방문할 예정이다.
다만, 브라질 고등법원은 스파이 혐의와 관련한 경찰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체르카소프를 송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WP는 미 법무부가 이달 24일 연방법원에 체르카소프에 대한 공소장을 제출했다면서 미국 송환이 추진될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전했다.
hwangc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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