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기업에 유리한 조건 달아 승인 보류…美수출통제에 대응책으로 활용"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미국과 중국의 '기술(테크) 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미국 기업들의 인수합병(M&A) 승인을 늦추거나 보류하는 '신무기'를 꺼내 들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신문은 다국적 기업 임원들과 업계 단체 등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중국 반독점 당국이 미국 기업이 관련된 다수의 인수합병건에 대한 심사를 늦추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는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이스라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타워 세미컨덕터를 52억 달러(약 6조8천억원)에 인수하는 계획이나, 미국 칩 제조기업 맥스리니어가 38억 달러(약 5조원)에 대만 실리콘모션(慧榮科技)을 인수하기로 한 거래 등이 포함돼 있다.
소식통들은 특히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이 일부 미국 기업에 대해서는 인수합병 승인의 전제 조건으로 다른 국가에 판매하는 상품을 중국에도 팔도록 요청하거나 중국 기업에 이득이 될 만한 조건을 내걸고 있다고 전했다.
WSJ은 미 정부가 안보 우려를 들어 반도체 등 전략적 첨단 기술과 제품의 중국 판매를 통제한 데 대한 대응으로 중국 당국이 이러한 요청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미국 기업들을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뜨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인텔의 경우 타워 인수로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칩 제조 능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었는데, 애초 올해 1분기 안에 계약을 완료한다는 목표였지만 최근 예상 시점을 올해 상반기로 늦췄다.
WSJ은 인텔이 2020년 중국 다롄 플래시메모리 공장 사업을 한국의 SK하이닉스에 매각하기로 한 거래를 중국 당국이 지연 끝에 자국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조건부 승인한 것도 관련 사례라고 짚었다.
중국 반독점 당국은 2021년에야 이를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중국 내 생산을 계속 확장하고 '중국 기업'으로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 있는 '제3의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돕는다는 조건이 붙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 화학기업 듀폰은 지난해 11월 중국 규제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전자재료 전문업체 로저스를 인수하는 52억 달러(약 6조8천억원) 규모의 계약을 취소했다. 이 기업은 로저스에 계약 해지 수수료만 1억6천250만 달러(약 2천억원)를 지불해야 했다.
미 반도체회사 브로드컴이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 VM웨어를 610억 달러(약 80조원)에 인수하는 거래와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형 게임업체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 역시 중국 당국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이 2000년대 후반부터 반독점 관리에 나설 때만 해도 미국은 이를 중국 시장 경쟁의 개선으로 여기고 환영하고 장려했다. 그러나 실상은 중국 국유 기업들은 각종 규제 심사를 대부분 면제받는 반면, 외국 기업이 포함된 거래를 검토할 때는 많게는 10개 기관이 관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과거에는 중국 당국의 인수합병 심사가 인력 등 자원 부족으로 늦어졌다면, 중국 당국이 반독점 관련 부서를 강화한 지금은 미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을 위한 '추가적 도구'로서 정치적·경제적 목표를 위해 활용되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중국이 외국계 기업 블랙리스트 작성이나 단속 등 외국 기술에 대한 접근을 더 어렵게 하거나 자본 유출로 이어질 수 있는 강한 방식을 꺼리는 대신, 외국 기업과 각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보다 미묘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합병 심사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미 컨설팅사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에이미 셀리코 대표는 "중국이 외국 기업들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드는 가운데 글로벌 인수합병에 대한 중국 당국의 승인을 얻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cheror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