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이탈리아서 100년만에 재등장한 모국어 보호법

입력 2023-04-14 07:07  

[특파원 시선] 이탈리아서 100년만에 재등장한 모국어 보호법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최근 이탈리아의 상황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1923년 2월 11일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어와 이탈리아 문화를 외국의 영향으로부터 보존하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언어 교정' 법률을 통과시켰다.
파시스트 정부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스러운 후예들이 외국어와 같은 야만적인 언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업용 간판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세금이 부과됐다.
이후 처벌은 더욱 강력해져 1940년에는 외국어 사용에 대해 최고 6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외국어, 특히 영어와 프랑스어 사용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올해 3월 31일 집권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 소속의 파비오 람펠리 하원 부의장은 이탈리아어의 진흥과 보호를 위한 지침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
8개 조항으로 구성된 법안 초안에는 공식적인 정보 전달에서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사용했을 경우, 최대 10만 유로(약 1억4천341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담겼다.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민간기업, 다국적 기업도 적용 대상이다. 외국 기업이라도 이탈리아에서 사업하고 싶으면 이탈리아어를 쓰라는 것이다. 매니저, CEO(최고경영자)와 같이 보편화된 영어 직책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람펠리 부의장은 "이탈리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는 이탈리아어로 표기돼야 한다"며 "국가는 이탈리아어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의회 논의를 거치지 않은 단계지만 해당 법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은 벌써 가열되고 있다. 특히 이 법안이 과거 파시스트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해 외국어 사용을 단념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번 법안은 100년 전 파시스트 정부가 도입한 법률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람펠리 부의장이 속한 FdI는 무솔리니 지지자들이 창설한 파시스트 성향의 이탈리아사회운동(MSI)에 뿌리를 둔 극우 정당이다. 빨간색, 녹색, 하얀색으로 불꽃 모양을 형상화한 FdI의 로고도 MSI 로고와 유사하다.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른 조르자 멜로니는 10대 시절 MSI 청년 조직에 가입하며 정치를 시작했고, 2012년에는 MSI를 계승한 FdI를 창당해 2014년부터 대표직을 맡았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우파 연합의 승리를 이끈 멜로니 총리는 "파시즘은 지나간 역사"라고 말했지만, MSI가 사용한 삼색 불꽃 로고를 FdI 로고에서 여전히 지우지 않고 있다.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극우 정치인으로 집권한 멜로니 총리는 취임 초기만 해도 이민·난민 정책을 제외하면 대체로 온건한 사회정책을 폈다. 경제 정책에서도 전임 마리오 드라기 정권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며 국제사회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집권한 지 6개월째를 맞는 최근 들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탈리아 내무부는 지난달 동성 부부의 친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놓았고, FdI는 대리모 출산을 '보편적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멜로니 총리는 지난 3일 베로나에서 열린 와인 박람회 '비니탈리'를 방문해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라나는 세대들이 강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문화와 정체성 교육을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멜로니 총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산업부에 해당하는 경제개발부를 '비즈니스 및 메이드 인 이탈리아(businesses and made in Italy)'로 명칭을 바꿨다. 농림식품부에는 '식량주권'이란 단어를 추가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같은 당 소속인 람펠리 부의장이 발의한 법안이 상·하원에서 통과될 경우 영어 철자 그대로 '메이드 인 이탈리아'를 적용한 멜로니 총리는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멜로니 총리는 파시즘과 결별했다고 주장하지만, 최근에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의구심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chang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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