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세사기 할퀴고간 자리엔 불신만…"거래 씨말라"

입력 2023-04-19 06:11   수정 2023-04-19 07:27

[르포] 전세사기 할퀴고간 자리엔 불신만…"거래 씨말라"
공시가 하락에 전세보증보험 가입기준 강화…역전세에 집주인들 '패닉'
전세사기 낙인찍힌 지역은 거래 단절…"시장 정상화까지 시간 걸릴 듯"



(서울=연합뉴스) 김치연 기자 = "손님이 전세 투룸 찾으시는데 2억500만원짜리 빌라, 그거 '126' 되나?"
18일 오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오랜만의 전세 손님에 대표 A씨는 곧장 전화를 걸어 '126'이 되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오자 A씨는 손님에게 "그건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안 된다"면서 다른 물건을 찾아보겠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126'은 다음 달부터 강화되는 HUG 전세보증보험 가입 주택가격 기준으로, 주택가격이 공시가격의 126% 이내여야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일 업계 등에 따르면 작년 수도권 일대에서 세입자의 전세 보증금을 받아 챙기는 전세사기가 잇따라 발생한 이후 현장에서 체감하는 전세 시장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기존 임대차 시장에서는 월세보다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전세 선호도가 높았지만, 사기 우려와 한 번에 많은 돈을 대출받아야 하는 부담감이 커진 탓에 전세가 오히려 외면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는 전세를 찾지도 권하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불신'이 자리 잡았다고 입을 모은다.
화곡동에서 21년째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 중인 A씨는 "화곡동이 전세사기로 낙인찍히다 보니 이 동네 공인중개사들은 영업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며 "손님들이 HUG 보증보험 가입이 되지 않는 전세 물건은 찾지도 않으니 우리도 보험 가입이 되지 않는 건 애초에 소개도 안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세사기 문제가 이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전세거래는 활발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신축 빌라 분양이 활발했고, 손님을 모으려는 컨설팅 업체 직원이 화곡동에만 수백명 활동했다고 한다.
A씨는 "컨설팅 업체 사무실에 가보면 적게는 5명, 많게는 40∼50명씩 직원을 두고 일했다"며 "나도 3억6천만원에 신축 빌라 전세 세입자를 데려오면 수수료로 6천만원을 분배해준다는 제안을 들었지만, 자식뻘인 어린 사람들 피를 빨아먹고 살아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에 거절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컨설팅 업체 대다수가 자취를 감췄지만, 여전히 공실로 남은 신축 빌라가 많은 만큼 어디선가 암암리에 영업 중일 것이라고 A씨는 전했다.



'전세사기 지역'으로 수식어가 붙은 곳에서는 전세 거래가 끊기면서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찾지 못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화곡동에서 20년 넘게 영업한 태양공인중개사무소 민복기 대표는 "전세 거래가 이전에는 10건 됐다면 지금은 3건도 겨우 하는 수준"이라며 "당장은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세입자가 문제지만, 조금 지나면 전세금을 못 돌려줘 파산하는 집주인들이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민 대표는 "지금도 세입자 전세 만기가 도래하면서 보증금을 못 내줘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집주인들의 문의가 많이 온다"며 "전세사기 지역으로 찍혀 전셋값은 떨어지고 수요도 없는 데다, 공시가격 하락과 보증보험 가입 기준이 강화되면서 집주인들은 그야말로 '멘붕' 상태"라고 덧붙였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강서구 다세대·연립주택 전세 거래는 작년 1월 766건으로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많았으나, 올해 1월에는 절반 수준인 390건으로 줄었다.
전셋값이 수천만원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다.
임차인이 강제경매를 신청한 전세 물건이 위치한 강서구 화곡동의 한 다세대 주택은 2021년 8월 전용면적 23.59㎡(5층)가 보증금 2억3천만원에 전세 계약됐으나, 올해 2월에는 이보다 큰 면적인 27.97㎡(3층)가 1억7천388만원에 계약됐다. 2년 새 5천만원 넘게 떨어진 셈이다.
신축 빌라도 분양이 되지 않자 화곡동의 한 오피스텔은 30% 할인 분양을 내걸기도 했다.
이른바 '건축왕' 사건으로 수많은 피해자가 나온 인천 미추홀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미추홀구 주안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전국에 미추홀구는 여기밖에 없다 보니 사람들이 여기선 전세 찾을 생각을 안 한다. 작년 11월부터 전세 거래는 아예 없다"며 "원래라면 집주인들이 전세 물건을 내놓으면서 '잘 팔리니 수수료 좀 깎아달라'고 했는데, 최근에는 '수수료 좀 많이 줄 테니 제발 세입자 좀 구해달라'고 한다. 그런데도 전세 물건이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집주인도 나가는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데, 새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으니 대출받아서 돌려주고 그 이자를 본인이 부담하거나 본인 돈으로 돌려준 뒤에도 공실이 발생해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미추홀구 숭의동의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숭의동에서는 전세가 씨가 말랐다. 대부분 HUG 안심전세대출을 받아 전세를 얻는 세입자가 많았는데 공시가격 하락과 보증 기준 강화로 그게 어려워지면서 전세 손님이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숭의동 빌라 전셋값은 작년 정점에 비해 30∼50%가량 하락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거기다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아파트가 경매로 쏟아지고 있고 그 낙찰가율이 감정가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서 그 물건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내년, 내후년까지는 숭의동 부동산 시장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며 한숨을 쉬었다.


업계에서는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제공됐던 전세자금대출이 오히려 독이 돼 돌아온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소득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전세대출이 전셋값과 매매가를 끌어올려 시장 전체에 거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세입자들이 받은 전세대출은 집주인의 갭투자 비용이 됐고, 저금리 시대가 지나고 금리가 올라가자 상환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받은 대출이 일종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일으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진통은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HUG 보증기준 강화 등 조처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태가 더 걷잡을 수 없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chic@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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