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지진피해에 민심이반…야권단일후보, 정권실정 집중공략
에르도안 재선시 이슬람주의 전면화…야당 승리시 세속·의회주의 복원
나토 등 서방과 관계 설정·우크라전 등 국제 정세에도 영향 불가피
(이스탄불=연합뉴스) 조성흠 특파원 = 2003년 총리 취임 후 20년 넘게 집권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집권 기간 최대 고비를 맞았다.
10일(현지시간) 외신 등에 따르면 나흘 뒤인 오는 14일 치러지는 대선을 통해 재선에 도전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6개 야당이 내세운 단일 후보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튀르키예가 수년째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지층 결집을 위한 각종 선심성 정책을 내세우고 있으며,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에르도안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다. 14일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28일 결선 투표에서 최종 당선자가 가려진다.
전문가들은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이 건국 이념으로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세속주의로 회귀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기회가 될지, 이슬람주의를 앞세운 에르도안 대통령이 종신 집권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될지 주목하고 있다.
◇ 에르도안 대 야권단일후보 양강구도…28일 결선투표 치러질 수도
이번 선거에 나서는 후보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 무하람 인제 조국당 대표,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 등 4명이다.
인제 대표가 5% 언저리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고 오안 대표는 군소후보로 분류되는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지지율 추이는 기관별로 들쭉날쭉하지만 두 후보가 40%대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으며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소폭 앞서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기에 대선이 가까워지고 지지층이 결속하면서 두 후보의 초접전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14일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 경우 선거는 종료되지만, 어느 후보도 과반을 득표하지 못할 경우 2주 뒤인 오는 28일 1, 2위 후보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가 실시된다.
현재까지 양상으로 보면 28일 결선 투표 가능성이 좀 더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와 같은 CHP 출신으로 지난번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붙었던 인제 대표의 지지층이 어느 후보로 향할지가 승패를 가를 수 있다.
전체 인구 8천500만 명 중 1천500~2천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 표심 역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친쿠르드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은 이번 대선에서 야당 단일 후보 진영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 에르도안 포퓰리즘 정책에 야권은 대대적 개혁 약속
이번 대선의 향배를 가를 결정적 요인은 수년째 계속되는 튀르키예의 경제난이다.
리라화 가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2018년 임기 시작 이후 76% 하락했다. 2013년까지 지난 10년간으로 기간을 넓히면 약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물가는 2021년 외환 위기를 계기로 폭등하기 시작해 지난해 10월 전년 대비 상승률이 85%를 넘기면서 최근 24년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로 인한 튀르키예 국민의 생활고가 극심해졌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금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종교적 신념을 앞세워 중앙은행장을 교체하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금리 인상을 막는 등 비상식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21세기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꼽힐 지난 2월 대지진은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 논란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2021년 11.4%에 달했던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 5.6%로 낮아진 데 이어 올해는 2.8%로 반토막 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지진으로 인해 성장률이 최대 2%포인트 더 낮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저소득층과 농촌 및 낙후 지역, 보수 이슬람 신자층 공략을 통해 지지층 결집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야당이 성소수자를 옹호하고 음주를 용인한다며 이슬람 교리를 내세운 캠페인을 펼치는 한편 정년 요건을 폐지해 조기 연금 수령을 가능하게 하고 수입 농산물 관세를 인상하는 등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냈다. 대선이 치러지는 이달은 아예 한 달간 가정용 가스를 무상 공급하기로 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경제 실정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그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회복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비정통적 경제 정책 철폐를 약속했다.
또한 대통령 중심제를 해체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한편 언론 자유와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회복함으로써 튀르키예의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강조했다.
◇ 이슬람 통치냐 세속주의 회귀냐…친서방 대 반서방 구도도
이번 대선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이 20년을 넘어간 만큼 향후 국가 진로에 결정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중임 대통령이 조기 대선을 실시해 승리할 경우 추가 5년 임기를 보장한 헌법에 따라 2033년까지 최장 30년간 집권할 수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으로선 지난 20년간 행정·입법·사법부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구축한 확고한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튀르키예가 지난 100년간 유지해온 세속주의 이념은 폐기 수순을 밟고, 튀르키예에 이슬람 교리를 기반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내에서도 갈등을 일으켜온 튀르키예는 앞으로도 당분간 서방과 불편한 관계를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런 이유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을 공개 지지해왔다.
반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꺾을 경우 튀르키예 정국과 경제 사회 전반은 대개조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저금리 정책을 철폐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을 보장하는 등 상식적인 경제 정책을 펼침으로써 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제를 의회 민주주의로 되돌리고 이슬람주의 대신 세속주의 이념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친서방정책을 통해 유럽연합(EU) 및 나토와의 관계 회복에도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극화된 경제 사회 구조와 이념 및 정치 지형을 볼 때 이 과정에서 극심한 저항과 혼란도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경우 튀르키예의 민주주의는 중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jo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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