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야당과 쿠르드 테러조직 결탁' 공격해 민족주의 자극
우크라 중재·서방과 긴장 활용해 국제적 리더 이미지 강화
연금 조기 수령·무상 가스 등 선심성 공약으로 현직 '프리미엄' 활용
(이스탄불=연합뉴스) 조성흠 특파원 =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이곳에선 이미 민족주의가 승자다."(영국 BBC)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재선은 경제위기로 비등한 국민의 불만을 쿠르드족 분리독립주의자 등 외부 세력으로 돌린 전략이 주효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함께 외교 및 국방 정책에서 강력한 튀르키예를 표방한 치적 홍보도 민족주의 표심을 결집하는 데 한몫을 했다.
각종 선심성 공약을 통해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을 활용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승리 요인이다.
야당은 경제실정에 따른 정권심판이라는 의제를 선점하고도 유권자들의 믿음을 얻지 못했다. 20년 집권 기간 주요 선거에서 연전연승한 에르도안 대통령에 비해 인물 대결에서도 밀린 양상이다.
◇ 에르도안, 쿠르드족 '제물' 삼아 경제난 민심이반 돌파
28일(현지시간) 치러진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승리했지만, 1차 투표 전만 해도 이번 선거에서야말로 그의 20년 집권이 끝날 것이라는 예상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숱한 스캔들과 쿠데타 위기를 이겨낸 에르도안 대통령이지만 심각한 경제난에 21세기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꼽힌 지진까지 겹쳤고, 6개 야당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에르도안 대통령이 꺼내든 카드는 바로 민족주의였다.
선거전 초반만 해도 지진 피해를 고려해 조용한 유세를 약속했던 그는 불리한 판세가 지속되자 튀르키예 최대 안보 위협으로서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시도를 쟁점화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친쿠르드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이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한 것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당선될 경우 튀르키예가 테러로 시달릴 것이라고 공격했다. 온라인에는 쿠르드 테러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 간부들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선거 캠페인 노래에 맞춰 손뼉을 치는 조작된 영상이 유포됐다.
외부 세력을 제물로 삼은 공격적 유세는 경제난 속 유권자의 불안 심리를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1차 투표 개표 결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야권 우세 지역인 대도시와 함께 쿠르드족 밀집지인 동부 국경 지역에서 승리했으나, 에르도안 대통령은 나머지 내륙 지역을 '싹쓸이'하며 전체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여기에 극우 민족주의 성향으로서 5%대 득표를 한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승기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함께 실시된 총선에서도 민족주의운동당(MHP)이 전체 600석 중 50석을 획득해 제3당 자리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승리당과 대연합당(BBP) 등 민족주의 계열 정당이 선전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 객원 연구원인 아슬리 아이든타스바쉬는 미 워싱턴포스트(WP)에 "포퓰리스트·민족주의적 담론이 모든 국가에서 효과적"이라며 "자유주의는 포퓰리스트 독재자에 맞서기에 구조적으로 불리하다"고 말했다.
◇ 국제 무대서 '이슬람 수호 국제적 리더' 이미지 메이킹
에르도안 대통령은 외교 및 국방 정책도 '강한 튀르키예'에 초점을 맞춰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을 중재하는 행보로 국제적 리더로서 위상을 과시했다. 지난해 3월에는 전쟁 후 첫 평화회담을 중재한 데 이어 7월에는 우크라이나 곡물의 해상 수출을 가능하게 한 흑해 곡물 협정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식량난 완화에 기여했다.
대선 결선투표를 열흘 앞둔 지난 18일에는 방송 연설을 통해 흑해 곡물 협정의 연장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과 관련해 미국 행정부로부터 F-16 판매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스웨덴과 핀란드로부터 PKK 연루자의 신병도 넘겨받기로 하는 등 실속을 챙겼다.
아울러 스웨덴에서 일어난 반이슬람 시위를 문제 삼아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막는 등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중동 내 이미지도 강화하는 효과까지 얻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이스탄불 폭발 테러 사건 역시 국내외적 긴장을 고조하고 내부 결속을 호소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사건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PKK 및 하부 조직 소탕을 명분으로 또다시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국경지대에 대대적 공습을 가했다.
미국 및 서방과의 갈등도 선거에 활용했다. 그는 최근 미국이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이번 선거로 미국에 교훈을 줘야 한다"고 비난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국산 전기 자동차 '토그(TOGG)' 생산, 상륙함 'TCG 아나돌루' 진수, 아쿠유 원자력발전소 연료 장전식 등 '튀르키예 최초'를 내세운 연이은 이벤트로 민족주의 유권자의 표심을 다잡았다.
◇ 존재감 약했던 야권…"유권자들, 야당 능력 신뢰 안해"
아울러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년 요건을 폐지해 조기 연금 수령을 가능하게 하고 한시적 무상 가스와 무상 인터넷 데이터 등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냈다.
지진 피해 지역에는 연내 32만 가구의 주택을 공급하는 등 대규모 재건 사업을 약속하며 민심을 달랬다. 실제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고전이 예상됐던 11개 지진 피해 지역 중 8곳에서 승리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메멧 알리 쿨랏은 "지진 피해자들은 처음에는 여당에 투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결국 누가 집과 직장을 재건할 것인지 답이 필요했다"며 "그들은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르도안임을 알고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반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와 야권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대체할 세력으로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6개 야당 단일 후보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야당은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나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 등 대중적 호소력이 있는 후보를 내세울 것을 요구해 진통을 겪었다.
6개 야당 연합이 반(反)에르도안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외에 뚜렷한 공통점이나 지향점, 내세울 만한 성과나 비전 역시 부족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결선 투표를 앞두고 난민 전면 송환을 약속하는 등 강경 민족주의 노선으로 급선회했지만 쿠르드족의 지지를 받는다는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이슬람 내 소수인 알레비파로서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배경이나 지금까지 야당 대표로서 선거 결과가 좋지 않았던 점 등도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 중동연구소의 고눌 톨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보통 지도자 주위에 집결한다"며 "유권자들은 야당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 충분한 믿음이 없다"고 말했다.
jo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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