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美 의도한 압박인가, 우발적 실수인가

입력 2023-05-19 07:07  

[특파원 시선] 美 의도한 압박인가, 우발적 실수인가
브리지티 주남아공 미국 대사의 '이례적' 기자회견
"러'무기제공 확신…용납 불가" 비난 후 하루 만에 사과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 일주일 전인 지난 11일 오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주재하는 각국 특파원들이 모여 있는 왓츠앱 단체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루번 브리지티 주남아공 미국 대사가 러시아 무기 공급 의혹 제기하며 남아공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현지 매체 뉴스24의 보도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이후 단체방은 기자회견 공지가 있었는지, 왜 외신기자는 아무도 초청받지 못했는지, 브리지티 대사의 발언 보도 내용이 사실인지, 발언 원문이나 영상을 구할 수 있는지 등을 문의하는 메시지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추후 남아공 현지 일부 매체만을 부른 것으로 확인된 미국 대사의 기자회견은 그 형식은 물론 발언 내용과 수위 등 여러 측면에서 정말 '이례적'이었다.
브리지티 대사는 기자회견에서 작년 12월 6∼8일 케이프타운 사이먼스타운의 해군기지에 정박한 러시아 화물선에 주목하고 있으며 "우리는 제재 대상인 이 배가 무기와 탄약을 싣고 러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주장의 정확성에 내 인생을 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남아공의 러시아 무기 지원을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fundamentally unacceptable)"고 하는가 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남아공이 스스로 천명한 비동맹·중립 정책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profound concerns)"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
브리지티 대사는 아울러 남아공이 미국의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으로 작년에만 4천억 랜드(약 28조원) 상당의 혜택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년부터는 AGOA 대상국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외교에 있어 양국의 갈등 관리는 보통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의 본국(미국 국무부)에서 상대국의 카운터파트(남아공 국제관계협력부)나 자국 주재 대사(주미국 남아공 대사)에게 비공개로 비판하고 압박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이 경우 상대국 주재 대사(주남아공 미국 대사)는 본부보다는 더욱 부드러운 태도로 양국 간 응어리를 풀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공개적으로 하더라도 외교부 대변인 성명, 주재 대사 초치 등의 순으로 강경 조치를 하게 된다.
브리지티 대사의 이번 기자회견은 이런 통상적인 외교 관례 측면에서도 이례적이라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게다가 대사의 입에서 나온 거칠고 단도직입적인 여러 표현은 소위 '외교적 수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에 따라 브리지티 대사의 기자회견이 미국 정부가 의도한 압박인지, 아니면 해군 출신 대사의 우발적인 실수인지를 놓고 외교가와 현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본부에서 아무런 지침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며 미국 국무부에서 브리지티 대사에게 남아공에 경고를 주라는 지침을 줬을 것으로 관측했다.
실제 브리지티 대사는 기자회견 전날 남아공 주재 일부 우호국 대사를 불러서 기자회견에서 밝힐 내용에 대해 사전 설명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미국 국무부가 브리지티 대사에게 모종의 지침을 내렸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현지의 다른 외교관은 "공개적으로 이렇게까지 비판한 것을 보면 본부의 지침은 있었을 공산이 크다"면서도 "브리지티 대사가 이런 방식, 이 정도 수위로 발언하리라고는 본국에서도 몰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브리지티 대사는 현지 언론매체만 따로 불러 기자회견을 한 것이 아니라 현지 매체의 요구로 회견하게 됐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남아공은 브리지티 대사의 주장을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치부하며 미국 대사의 기자회견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히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고, 고위급 군사 교류에 나서며 러시아와 유대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아프리카에서 축소된 영향력을 회복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온 미국은 부랴부랴 수습이 나선 분위기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12일 토니 블링컨 장관이 나레디 판도르 남아공 외무장관과 통화를 하고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고 밝혔고, 브리지티 대사 역시 같은 날 판도르 장관을 만나 자신이 "선을 넘었다"며 공식 사과했다.
이는 브리지티 대사의 폭탄 발언 직후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서 베단트 파텔 수석부대변인이 제재 대상인 러시아 선박이 남아공 항구에 정박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고 밝힌 것과 대조된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지난 주말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각각 통화했다며 양국이 아프리카 6개국 정상이 참여하는 평화사절단을 만나기로 합의했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일각에서는 아프리카 평화사절단이 이르면 다음 달 모스크바와 키이우를 차례로 방문해 평화 협상이나 정전을 중재하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의도한 압박이었든, 우발적인 실수였든, 정제되지 않은 압박이었든 간에 미국은 이번에 남아공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나라라고 새삼 느꼈을 것 같다.
자국 주재 미국 대사를 통한 이례적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중립적인 비동맹 국가를 자처하며 외교적 보폭을 넓히는 남아공을 보면서 말이다.

hyunmin62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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