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EU집행위원장 방중 후 확산…"세계화된 경제, '완전한 중국 분리' 우려"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최근 서방 국가들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협을 논할 때 쓰는 표현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으로 바뀌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대(對)중국 분야에서 '디리스킹'이라는 말이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30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중국을 방문하면서다.
당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요구한 디커플링을 유럽이 왜 안 따를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나는 중국으로부터 디커플링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들어맞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는 흑백이 아니고 대응 역시 흑백일 수 없다"며 "이것이 우리가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이후 독일·프랑스 외교 당국은 디리스킹을 국제 구도로 끌고 들어갔고, 아시아 국가들도 수십년 동안의 성공적인 경제적 통합을 해체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디커플링이 '너무 나간 것'이라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했다고 NYT는 설명했다.
급기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까지 4월 27일 정책연설에서 "우리는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을 지지한다"고 말하며 디리스킹이라는 용어는 점점 퍼져나갔다. 설리번 보좌관은 "디리스킹은 근본적으로 탄력적이고 효율적인 공급망을 확보해 어느 국가의 강압에 종속될 수 없다는 점을 보장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S. 자이샨카르 인도 외교부 장관도 지난 17일 "세계 경제의 위험 제거(de-risk)도, 책임 있는 성장(responsible growth)이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거들고 나섰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G7 정상회의에 참석, "중국은 갈수록 국내에선 권위주의적으로, 국외에선 공세적(assertive)으로 바뀌고 있다"고 날을 세우면서도 "(G7의 대중국 연대는)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코 싱가포르 정부 사이버보안국장은 '일부 영역에서는 분리, 다른 영역에서는 협력'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디리스킹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미 세계화된 경제로서는 중국의 시장·제조기반과 미국이 승인한 공급망을 완전히 떼어놓는 상황이 우려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 변화를 두고 중국을 바라보는 서방 내 복잡한 시선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진영이 전방위적 중국 고립 전선을 시도하고 있지만, 유럽 일부 국가가 현실적인 실리 등을 감안한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는 등 단일대오에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프레임 변화를 통해 특정국 배제나 분리를 뜻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디커플링보다는 중국이 갖고 있는 위험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대중 압박의 명분을 보태며 이탈을 다잡으려는 차원이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인 셈이다.
다만 NYT는 서방이 쓰는 용어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중국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지난달 말 논평에서 "디리스킹이 디커플링을 감추려는 것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있다"며, 미국의 접근법이 "세계를 지배하는 지위 유지에 관한 불건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화권 논평가들 가운데도 디리스킹에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칼럼니스트 알렉스 로는 "(서방의) 정책에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까"라고 물으며 "아닐 것이다. 덜 호전적으로 들릴 뿐 근저에 있는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그대로다"라고 평했다.
외교 분야에선 올해 4월께부터 유행이 됐지만 원래 디리스킹은 미국 정부의 테러·돈세탁 제재와 관련해 오래 전부터 쓰이던 말이었다. 금융기관이 문제 소지가 있는 고객의 위험만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모호하다 싶은 영역까지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거래를 중단하는 경우를 가리켰다.
예컨대 은행들이 시리아 같은 나라에서 제재 위반을 피하려고 몸을 움츠리는 디리스킹을 하는 바람에 '모호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들까지 피해를 본다는 비판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디리스킹으로 제재 대상인 거래 행위가 음지로 숨거나 고도화돼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NYT는 디리스킹이 대중국 외교 영역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된 것은 민주주의의 진영이 맞닥뜨린 도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위험 행동을 방지하면서도 강압 위협이 충분히 줄어들 정도로 중국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목표는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 매체는 "디리스킹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미국과 동맹국들은 일부 기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규제 설정을 해야겠지만,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 중인 나머지 기업들은 그대로 중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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