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영국서 쓸쓸히 숨진 비운의 알레마예후 왕자
버킹엄궁 "유해 발굴 시 다른 묘지들도 손상돼"…"제국주의 오만" 비판
(서울=연합뉴스) 최인영 기자 = 19세기 영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에티오피아 왕자의 유해를 돌려달라는 요청을 영국 왕실이 받아주지 않았다.
23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알레마예후 왕자의 가족은 왕자의 유해를 에티오피아로 송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왕족 후손인 파실 미나스는 "우리는 가족으로서, 그리고 에티오피아인으로서 그의 유해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곳은 그가 태어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그가 영국에 묻힌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버킹엄궁 대변인은 BBC에 보낸 성명에서 윈저성 성조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알레마예후 왕자의 유해를 옮기다가는 다른 이들의 유해도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유해 송환이 어렵다고 밝혔다.
버킹엄궁은 "주변에 있는 상당수의 다른 유해들을 건드리지 않고 유해를 발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버킹엄궁은 또 "예배당 당국이 알레마예후 왕자를 기릴 필요성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만, 고인의 존엄성을 지킬 책임도 있다"고 덧붙였다.
7세에 고아가 되어 영국에 온 알레마예후 왕자는 10여년의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862년 그의 아버지인 테워드로스 2세 황제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를 더 강하게 만들고자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동맹을 맺고 싶다고 서한을 보냈지만 응답받지 못하자 영국 영사를 포함한 유럽인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에 영국은 군대를 보내 테워드로스 2세를 압박했고, 1868년 4월 영국군에 포위당한 그는 포로가 될 수는 없다며 투항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국은 인질을 구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수십마리의 코끼리와 노새 수백마리를 동원해 에티오피아의 유물을 약탈했다.
영국군은 알레마예후 왕자와 그의 어머니인 티루워르크 위베 황후도 생포해 데려갔다.
그러나 영국으로 가는 길에 황후는 세상을 떠났고 혼자가 된 알레마예후 왕자는 1868년 6월 영국 땅을 밟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알레마예후 왕자를 가엾게 여겨 재정적 후원을 해주고,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왕자와 동행한 트리스트람 찰스 소여 스피디 대위를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알레마예후 왕자의 영국 생활을 비참하기만 했다. 그는 왕립 학교에서 교육받았지만 괴롭힘과 인종 차별을 당했다.
그는 집에 가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무시당했고, 리즈에 있는 개인 주택에서 과외를 받았다.
그러던 중 폐렴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린 알레마예후 왕자는 한때 자신이 독살됐다고 생각하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879년 1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레마예후 왕자의 사망 소식을 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너무 슬프다. 낯선 나라에서 단 한 명의 가족이나 친척도 없이 혼자였다.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다"고 애도하며 윈저성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도록 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그의 묘비명에는 "나는 나그네였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줬다"고 적혀 있다.
WP는 많은 에티오피아인들이 영국박물관에 남아 있는 에티오피아의 보물들과 함께 알레마예후 왕자를 "어린 시절 고국에서 (영국이) 훔친 왕자"로 부른다고 전했다.
알레마예후 왕자의 유해를 돌려달라는 요청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7년 기르마 월데기오르기스 당시 에티오피아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정식 서한을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에티오피아 왕실 후손인 아베베치 카사는 "우리는 그가 돌아오기를 원한다. 외국에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새로 왕위에 오른 찰스 3세에게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기를 기대했다며 애통해했다.
에티오피아계 미국인 작가 마자 멘기스테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서 비롯한 납치"라고 비판했다.
에티오피아 외무부는 WP에 보낸 성명에서 "알레마예후는 전쟁 포로"라며 유해 송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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