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서 12개국 정상회의…룰라 "우나수르 되살리고 공통 화폐 도입"
美에 눈엣가시 마두로 참석…우루과이·칠레는 '마냥 환영 못 해'
(멕시코시티·상파울루=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김지윤 통신원 = 남미 12개국이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서 본격적인 지역·경제통합 모색에 나서고 있다.
특히 중남미 국가들의 '달러 의존도 줄이기'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가운데 달러를 대신할 지역 공통 화폐 도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자는 제안이 제기되는 등 세계 무대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 12개국 정상급 총집결…'뭉쳐보자' 의지 꿈틀
30일(현지시간) 브라질리아 이타마라치 궁전에는 남미 12개국 정상회의에 초청받은 각국 정상이 속속 도착했다. 이타마라치 궁전은 브라질 외교부 청사 명칭이다.
개최국인 브라질을 비롯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가이아나, 파라과이, 수리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 11개국 정부 수반이 모두 참석했다. 시위대에 대한 무리한 진압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는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만 의회 허가 없이 출국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불참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개회사에서 "우리는 이념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통합 노력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뒀다"며 "그간 우리는 대화와 협력 메커니즘을 포기했고, 그것으로 우리는 모두 패배한 것과 다름없다"고 운을 뗐다.
분열을 끝내고 재통합의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 그는 "어떤 나라도 현재의 다양한 위협에 홀로 맞설 수는 없을 것"이라며 "우리가 함께 행동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룰라 대통령은 그러면서 회의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기보다는 그간의 반목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로 삼자고 역설했다.
이후 비공개로 전환된 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이념을 넘어선 통합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현지 기자들과 만나 "커다란 잠재력을 지닌 중남미 국가들은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우리는 인류에게 닥친 위기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 "달러 줄이기·남미국가연합 재건"…탈(脫)미국 노골화하나
브라질 외교부에 따르면 이번 회의의 주요 목표는 보건, 기후변화, 국방, 초국가적 범죄 퇴치, 인프라 및 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각국의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동시에 남미 협력 의제를 재활성화하는 데 있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의제들 속에 룰라 대통령은 보다 눈에 띄면서도 간결한 화법으로 회의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개최국 정상이기도 한 룰라는 "지역 외 통화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달러 대신 지역 공통 화폐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자고 밝혔다.
룰라 대통령은 최근 중남미 여러 나라의 '탈달러' 움직임을 주도하는 행보를 보인다.
취임 전 가칭 '수르'(SUR·스페인어로 남쪽이라는 뜻) 라는 구체적인 화폐 명칭 구상까지 밝혔던 그는 지난 3월엔 중국과의 무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 및 브라질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역시 "상황이 변하고 있다"며 위안화 확장 추세에 동참하겠다는 취지의 신호를 보냈다.
룰라 대통령은 또 개발은행을 통한 남미 내 저축 서비스 구상, 남미보건연구소 강화, 학생·교수의 자유로운 이동 프로그램 도입 등 10가지 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 1월 취임 전부터 강조했던 남미국가연합(우나수르·UNASUR) 재건 노력도 호소했다.
'남미판 유럽연합'으로 불리는 우나수르는 2008년 룰라 2기 정부 당시 브라질리아에서의 합의에 따라 남미 12개국 참여로 창설됐으나, 결속력 약화로 낡은 간판만 남아 있는 상태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우나수르는 이념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심화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공통 관심사의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 미국에 '눈엣가시'인 마두로 띄우며 맞서기?…"이념 넘어 힘 모아야"
사실 이번 회의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끈 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참석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2018년 대선 승리로 재집권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독재자에 의한 부정선거의 결과"라고 간주하며 전방위 제재에 나섰다.
국제 사회에서 고립무원 처지였던 마두로는 그러나 1990년∼2000년대에 이은 중남미의 제2 온건 좌파 물결(핑크 타이드) 속에 국제사회 합류를 타진했고, 룰라의 지원 속에 사실상 외교무대에 재등판하게 됐다.
앞서 룰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한 마두로 대통령은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입을 희망하는 등 이웃나라의 도움을 기대하는 의중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회의에서도 각국 정상은 대체로 마두로 대통령을 환영하며 국제무대 복귀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만, '우파' 성향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 우루과이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내러티브라는 식으로 (포장해) 표현하는 것에 놀랐다"며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려 해선 안 된다"며 베네수엘라의 광범위한 반정부 인사 탄압과 인권 유린을 경계했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역시 베네수엘라에 대한 룰라의 접근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다만, 현지에서는 룰라의 '마두로 띄우기'가 미국을 적당히 견제하는 동시에 남미 통합 모멘텀을 유지하려는 의도적인 언사라는 분석도 나온다.
walden@yna.co.kr kjy32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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