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증명서도 위조…범행동기 등 실체 규명 마무리 안돼
필리핀 국가배상 여부도 미지수…"국가 동의 없으면 정부 상대 소송 불가"
(앙헬레스[필리핀]=연합뉴스) 김범수 특파원 = 필리핀 법원이 6일(현지시간) 한인 사업가 지익주씨를 납치해 살해한 전직 경찰관과 정보원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 한국과 필리핀을 떠들썩하게 한 끔찍한 범죄가 사건 발생 6년여만에 단죄받게 됐다.
2016년 10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필리핀 한인사회뿐 아니라 많은 현지인을 충격에 빠뜨렸었다.
현직 경찰이 무고한 한인을 납치한 뒤 살해했다는 점에서 공권력을 통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현지에서 확산했다.
더욱이 경찰과 검찰 등 사법당국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잔인하고 치밀한 범행 수법은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사망 당시 53세였던 지씨는 한진중공업 임원을 지냈으며, 필리핀에 부임한 뒤 수빅 조선소 건설에 참여했다.
그는 퇴직 후 개인 사업을 하다가 2016년 10월 18일 경찰에 의해 납치돼 살해됐다.
경찰청 마약단속국(PNP AIDG) 소속 경찰관인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인 제리 옴랑은 당일 오후 앙헬레스 소재 자택에서 지씨를 납치했다.
범인들은 지씨를 본인의 차량에 강제로 태운 뒤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데리고 가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들의 잔학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자신들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인근 칼로오칸시의 화장장에서 '호세 루아마르 살바도르' 명의로 된 위조 사망증명서를 제출한 뒤 시신을 소각했다.
이어 지씨의 유해를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번 사건은 피살자의 시신이 없는 관계로 경찰이 수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칫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7년 1월 화장장 업주의 사무실에서 지씨 소유의 골프채가 발견돼 수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또 지씨의 이웃 주민이 납치 당일 촬영한 현장 영상도 경찰 수사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아직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실체가 규명되지 않아 필리핀 사법당국의 후속 조치가 이어질지 주목된다.
사건 발생 12일 뒤에 신원불상자가 지씨가 피살된 사실을 모르는 유족을 상대로 몸값을 요구해 500만 페소(약 1억1천600만원)를 뜯어내기도 했다.
이 사건 수사를 맡은 경찰청 납치수사국(AKG)은 총 14명의 용의자를 가려내 검찰에 송치했지만, 이들이 몸값을 받아낸 신원불상자와 연관이 됐는지 여부는 밝히지 못했다.
다만 납치수사국은 지씨가 앙헬레스 지역의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금품을 갈취해온 공무원들에게 상납을 거부하다가 보복을 당한 것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피해 유족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도 미지수다.
주필리핀한국대사관이 현지 법률회사에 의뢰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 헌법 제16조 3항에 명시된 국가 면책 조항은 "국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정부 또는 대통령을 피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찰청장 등 개인에 대한 소송은 제기할 수 있으나, 이 경우도 납치살인 행위에 대한 불법적인 고의성이나 권한 남용이 입증돼야 한다.
다만 형사 사건의 경우 판결을 근거로 피해 금액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별도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한편 이번 판결이 필리핀에서 자주 발생하는 한인 대상 강력 범죄에 사법당국이 엄정히 대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2년 이후로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인 살해 사건은 총 57건에 사망자는 63명에 달한다.
그러나 정식 재판을 통해 실형이 선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bum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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