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중국과 패권 경쟁하려면 사우디 소외시킬 수 없어"
"미-사우디, 다극적 국제질서 속 관계 전환 관리 노력"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협력 강화를 타진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행보에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새 국면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달 6일(현지시간)부터 사흘 일정으로 사우디를 방문한 블링컨 장관은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등과 만나 이란·수단 문제에서부터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지역 인프라, 청정에너지,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을 논의했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원유 증산 문제 등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와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온 것과는 극명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앞서 양국 관계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빈살만 왕세자를 국제사회에서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 급격히 얼어붙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러한 입장 변화에 미국이 특히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사우디가 필요하다는 지정학적 현실을 인정하고 관계 회복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들과 전문가들을 인용해 지난 몇 달 동안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핵심 참모들이 냉엄한 새 지정학적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8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중국, 러시아와 경쟁하려면 사우디와 같은 강력한 파트너를 소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 변화는 블링컨 장관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양국 사이에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우리 국민과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기회를 확대하고 발전을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NYT는 블링컨 장관의 발언에 대해 미국 관리들이 보통 가까운 동맹국에 하는 친밀감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사우디의 실질적 국가 지도자인 빈살만 왕세자는 미국의 전통적 맹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행보를 강화해왔다.
빈살만 왕세자는 블링컨 장관의 사우디 방문 며칠 전에도 미국 등 서방의 제재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사우디 제다에서 만나 회담했다.
또 지난 6일에는 오랜 앙숙이었던 이란이 리야드에 사우디 주재 대사관을 7년 만에 다시 열었다. 사우디와 이란은 지난 3월 중국의 중재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었다.
다음 주에는 사우디 투자부 주최로 아랍과 중국 기업가들의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후원하는 LIV 골프와 미국 스포츠의 자존심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의 합병도 빈살만 왕세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빈살만 왕세자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NYT는 미국에 대한 의존을 헤지(hedge·위험 회피)하고 파트너십을 교묘하게 다루는 그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짚었다.
NYT에 따르면 특히 최근 빈살만 왕세자가 중국과 밀착 행보를 보인 것이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전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빈살만 왕세자의 친중국 행보를 주시해왔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우리는 누구에게도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서도 "미국은 여전히 역내 대부분의 국가에 1순위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후세인 이비쉬는 사우디와 미국이 새로운 다극적 국제질서의 현실 속에서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제 두 나라의 관계가 "미국이 일부 유럽 파트너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더 비슷해 보인다"며 양측이 핵심인 안보 협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사우디가 권력이 분산된 세계에서 "지역적, 국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자로 나서기 위해 힘을 과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산 무기 판매, 이란 등 중동의 역학 관계, 테러 조직과의 전쟁 등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사우디는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핵심 파트너다.
블링컨 장관을 비롯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브렛 맥거크 국가안보회의(NSC)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 아모스 호흐슈타인 백악관 에너지 안보 담당 선임고문이 최근 줄줄이 사우디를 찾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인권을 강조해온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와 관계 강화에 나서자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카슈끄지가 생전에 만든 미국 내 비영리단체 '아랍 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AWN)의 세라 리아 윗슨은 "빈살만 왕세자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에 차이가 거의 없다"며 "더 굴욕적이지는 않더라도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yunzh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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