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품으로 받은 카메라로 1953∼1954년 한국 모습 촬영한 필름 보관
(생파리즈르샤텔[프랑스]=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전쟁통에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으며 찰나의 위로를 얻곤 했던 앙드레 다차리(91) 씨.
70년이 지났어도 길바닥에서 주저앉아 배를 곯던 그 아이들을 떠올리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삼키려고 애쓰지만 끝내 눈물이 뚝, 뚝 하고 떨어진다.
프랑스 파리에서 남쪽으로 265㎞ 떨어진 생파리즈르샤텔에 있는 다차리 씨의 자택을 지난 9일(현지시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의무적으로 외국으로 파병을 가야 했던 그는 우연히 얻게 된 사진기로 1953∼1954년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 99장을 TV에 띄워 한 장 한 장 보여주다가도 몇번이나 울컥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의 사진 속 피사체로 자주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이라면서 똑같은 일이 우크라이나에서도 벌어진다고 말할 때는 목이 메었다.
다차리 씨는 그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의지할 데가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의 미래가 어땠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훔쳤다.
"아이들이 입을 옷도 없고,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는다고…. 그건 정말…" 문장을 끝내지 못한 다차리 씨는 마음이 저미어온다는 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전쟁은 정말 비열한 짓이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다차리 씨에게 전쟁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짧았지만, 단호함이 묻어났다.
다차리 씨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발해 한국 부산으로 가는 길에 들른 일본에서 게임에 참여했다 운 좋게 1등으로 뽑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사진기"라는 니콘 카메라를 받았다.
그 당시 한국에서 필름을 구하는 게 쉽지 않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예쁜 장면을 마주쳤을 때", "아름다운 곳을 지날 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가 촬영한 사진에는 아이들이 많다. 엄마 품에 안겨있거나, 등에 업혀있거나, 한복 차림으로 옹기종기 모여있거나…. 사진 속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사진들을 보여줄까?" 다차리 씨는 소파에서 일어나 TV를 켜고, TV와 연결된 노트북을 느리지만 능숙하게 조작하더니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디지털화한 사진들을 보여줬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희미하다"고 했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러 가려고 신발을 닦고 있는 모습,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건네준 과일까지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독에 김치를 보관했는데 해가 나는 날이면 뚜껑을 열어놓고 비가 올 때는 뚜껑을 닫아놓는 게 신기했고, 지붕을 고치는 속도가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아주 빨랐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먼발치에서 한강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역 앞을 지나던 철로를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는 2019년 한국을 찾았을 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너무나 달라져 있는 모습에 당황했어요. 또 동시에 감동했죠. 나의 참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
애석하게도 추억이 담긴 카메라는 그의 수중에 없다. 한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베트남에 갔을 때 식당에서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필름이라도 남아있어 다행이라며 웃었다.
나이가 들어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안 들리고, 걷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다차리 씨는 그때 찍은 사진들과 함께 "나의 두 번째 조국"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차리 씨는 6·25 전쟁을 정치적으로 끝내려는 휴전 회담이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는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53년 3월 한국에 도착해 참호 속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해왔다.
한국에 들어온 그해 7월 정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다차리 씨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 용산에 주둔한 프랑스 정전감시단 일원으로 1954년 8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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