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기독교 적대적 표현들 상당수 삭제…"태도 변화 고무적"
"관계 정상화 대비해 점진적 준비"…"큰 변화 아냐" 신중론도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연내 외교관계 정상화를 추진 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교과서에서 최근 유대인이나 기독교에 적대적인 표현이 상당수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미 CNN 방송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00년대 초부터 사우디 교과서를 모니터링해 온 '학교 교육에서의 평화와 문화적 관용에 대한 감시 연구소'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비정부단체는 지난 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최신 사우디 교과서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예시들이 대부분 삭제됐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2022∼2023년 사우디 교과 과정의 80여개 교과서와 이전 교과 과정의 180여개 교과서를 비교 조사한 결과 이런 차이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이슬람의 적",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율법과 복음을 '파괴하고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같은 문구가 삭제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표현도 다소 완화됐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적", "시온주의 적"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점령"이나 "이스라엘 점령군"으로 대체됐다.
2022∼2023년 교육 과정 중 '애국 시' 수업에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에 반대한다"는 예시가 삭제됐고,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1980년대 후반 벌어진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의 긍정적 결과를 설명하는 대목도 빠졌다. 한 교과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장 전체를 아예 들어내기도 했다.
연구소는 이러한 변화가 "이스라엘과 시온주의에 대한 (사우디의) 태도에 진전이 있을 수 있다는 고무적인 신호"라고 해석했다.
이 밖에 사우디 교과서에 헤즈볼라, ISIS(이슬람국가), 알카에다, 후티 민병대, 무슬림 형제단 등 특정 이슬람 단체를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고 연구소는 전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의 중동국가 전문 연구원인 미라 알 후세인은 CNN에 "이런 변화는 걸프만 인근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세속적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대부분 외부의 특정 청중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갑자기 180도 전환해 관용을 설파하기 시작한 건 매우 야심에 찬 일"이라고 덧붙였다.
CNN은 다만 연구소의 이번 조사 결과를 자체적으로 확인하진 않았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교육부 등도 CNN의 관련 질의에 응하지 않았다.
워싱턴 내 걸프 국가 연구소의 상주 연구원인 크리스틴 디완은 CNN에 보낸 이메일에서 사우디가 최근 몇 년간 더 세속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며 "이에 따라 시아파, 유대교, 기독교를 비하하는 종교적 표현이 완화됐다"고 지적했다.
디완은 사우디 교과서의 변화도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편협성을 완화하려는 노력과 일치하며, 이스라엘과의 외교 정상화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질 경우를 대비해 점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교과서 내 일부 표현 삭제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도 있다.
사우디-이스라엘의 외교 관계를 연구하는 아지즈 알가시안은 "교과서 수정은 미묘한 변화이며,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의 큰 변화를 시사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스라엘 일부 사람은 사우디와의 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관한 모든 상호 작용을 정상화를 향한 긍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우디의 인식 변화가 교과서에만 영향받는 건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의 중동학과 교수인 엘리 포데는 "20년 전이었다면 (교과서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겠지만, 오늘날엔 소셜미디어와 수많은 사회화 도구가 교과서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완 역시 "교과서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견해는 미디어 메시지, 글로벌 이벤트,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며 "이런 것들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연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다양한 중재 노력을 펴고 있다.
2020년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모로코 등과 '아브라함 협약'을 맺고 관계를 정상화한 이스라엘은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대아랍권 외교 확장의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 조건으로 미국에 정밀무기 금수조치 해제, 우라늄 농축 및 핵연료 기술 등 민간 핵 프로그램 개발 지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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