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제한 말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 성명에 관변 중국반도체협 가세
中, 디리스킹 논의와 기후협력 연계…"中 기술 발전 막으면 보복"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중국이 미국의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 전략을 저지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다.
내달 1일부터 첨단 반도체 제조의 주요 원료인 갈륨·게르마늄 수출 제한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중국은 이를 앞두고 미국에 여러 경로를 통해 '승부수'를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미국과 관계 회복 기류를 유지하면서 '뜻이 맞는' 미국 반도체 업계와 공조를 모색하는가 하면 중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존 케리 미국 기후변화 특사의 사흘간 방중 회담에서 미중 기후변화 협력을 디리스킹 해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셰펑 주미 중국대사는 디리스킹을 의식하면서 미국이 중국의 기술 발전을 견제하는 새로운 조치를 하면 확실히 대응하겠다는 경고성 발언도 내놓았다.
◇ 디리스킹 저지 우군 확보 나선 中, 美반도체協·키신저에 공들이기
지난 17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추가적인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 중국은 반색했다. 중국 당국이 바라던 바였다.
중국은 SIA가 대중국 반도체 제재로 자칫 중국 시장을 잃고 미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데 주목했다.
SIA는 인텔, IBM,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을 회원사로 두고 있다.
SIA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작년 10월 ▲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 ▲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사실상 중국에 팔지 못하도록 한 데 이어 조만간 인공지능(AI)용 저사양 반도체 수출 길도 막을 것으로 예상되자 반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엔비디아·인텔·퀄컴 등은 AI 기술 선도 기업이며, 상하이 소재 경제지 제일재경에 따르면 엔비디아와 인텔의 작년 매출 가운데 중국(홍콩 포함) 비중은 각각 21.4%, 27%에 달했다.
국가 전략 차원인 미 행정부의 디리스킹 정책이 이들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상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 놓칠세라 중국은 곧바로 '공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관변단체 격인 중국반도체산업협회(CSIA)는 19일 낸 성명을 통해 미국이 최근 몇 년 새 여러 가지 제한 조치로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화와 세계 공급망 안정을 파괴했다면서, 이는 결국 미국 반도체 산업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CSIA는 그러면서 세계 반도체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분업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시장으로서 글로벌 파트너들에 80% 이상의 시장을 제공하며 공급망을 지탱했다"고 강조했다.
이로 미뤄볼 때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미·중 반도체 업계 간 '공조'가 조만간 현실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최근 미국 정보기술(IT) 업계 대기업들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16일 이례적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를 만나 MS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AI 기술을 중국으로 들여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리창 총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퀄컴·인텔 등을 상대로 친기업 메시지를 강조해왔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전날 공동성명을 통해 민간기업을 국유기업과 동일하게 대우하겠다는 서약을 발표했다.
이는 경기침체 극복을 위해 민간기업 신뢰 회복을 꾀하려는 조치이며, 중국 내에서 외국 기업들의 입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중국이 미·중 냉전을 종식한 '핑퐁 외교'의 주역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은 전날 키신저를 베이징에서 만나 미·중 관계 회복을 위해 미국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 '먼저 기후협력' 요구한 美…디리스킹 연계 강조한 中
지난 16∼19일 케리 특사의 방중은 의미가 각별했다.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종식 이후에도 이른바 '정찰 풍선' 사건 등으로 경색됐던 미·중 관계를 푸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방중에 이은 세 번째 모멘텀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협력이 미국의 디리스킹과 중국의 갈륨·게르마늄 수출 제한 등의 '강 대 강' 경제·안보 이슈를 비켜 가면서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도 관심을 끈 대목이다.
시 주석은 2020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2030년에 탄소 배출 정점을 찍고 2060년에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이른바 '쌍탄'(雙炭)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미국 역시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는 기후변화 대처 노력이 미흡했으나, 바이든 행정부 들어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국제사회는 케리 특사의 이번 방중을 통해 세계 최대 환경오염 배출 국가인 미·중 양국이 '의미 있는' 합의를 할지에 주목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견 확인'이었다.
케리 특사는 까다로운 외교 문제를 떼어놓고 기후 위기 문제에서라도 우선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중국 측은 외교 문제를 병행 해결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오히려 케리 특사와 접견한 중국의 한정 국가부주석은 "기후변화 대응은 중미 협력의 중요한 측면"이라면서도 "양국 정상의 (작년 11월) 발리 공동 인식을 이행하고, '상호 존중'·'평화 공존'·'협력 호혜' 3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케리 특사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사흘간 방중 마무리 브리핑에서 "중국과의 기후변화 협력이 이뤄지기까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로 현실의 벽을 인정했다.
◇ 中, 곧 갈륨·게르마늄 수출 제한…"앞길 막는다면 보복"
첨단 반도체 제조와 통신·군사 장비 용도로 쓰이는 갈륨과 게르마늄은 말 그대로 중요 재료다.
문제는 중국이 갈륨과 게르마늄 생산·공급을 사실상 독점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들 금속 세계 공급량의 80∼90%를 공급한다.
중국 상무부는 수출통제법, 대외무역법, 세관법 등 규정에 따라 갈륨과 게르마늄 등 30개 품목에 대해 내달 1일부터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없도록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안보와 이익을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 당국은 공공연히 미국의 디리스킹을 겨냥한 조처라는 속내를 비쳐왔다. 바꿔말하면 미국이 디리스킹 정책에 변화를 준다면 중국 역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디리스킹은 사실 오래전부터 계획되고 실행돼온 정책이다.
2019년 5월부터 중국의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의 대명사인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를 겨냥해 5G용 반도체 칩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이어 작년 10월 자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에 대해 첨단 제품·기술의 중국 수출도 차단했다. AI용 반도체도 조만간 수출 차단 대상이 될 수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작년 8월 중국에 대한 투자를 철저히 배제한 반도체법(CHIPS Act)에 서명해 시행에 들어갔다.
미국은 아울러 네덜란드 ASML과 일본 니콘 등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들도 대중국 수출 통제에 동참하도록 조치했다. 또 한국·대만·일본과 함께 중국을 뺀 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인 '칩4'도 가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갈륨·게르마늄 수출 제한 조처는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카드로 여겨진다.
셰펑 주미 중국대사는 전날 미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애스펀 안보포럼 대담에서 중국은 미국과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도 미국이 투자 규제 등 중국의 기술 발전을 견제하는 새로운 조치를 도입하면 확실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려고 동맹들을 결집하고 있다. 이것은 '일 대 일'이라는 게임 규칙에 어긋난다"며 불공정하다고 직격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는 첨단 무기 등의 제조로 이어질 수 있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은 물론 관련 기술 습득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할 목적으로 디리스킹 전략을 편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패권 경쟁 차원에서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을 상대로 디리스킹 전략을 펴고 있다는 점에서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에 중국 역시 물러설 의지가 없어 보이지만, 희토류·리튬에 이어 갈륨·게르마늄까지 맘대로 공급을 조절하는 '경제적 강압' 국가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할 처지다.
희토류 수출 제한 때와 마찬가지로 여타 국가들이 갈륨·게르마늄 추가 생산으로 이른 시일 내에 '대안'을 마련한다면 중국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kji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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