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매체 "여성 인권에 대한 중국 내 분열·미중의 깊은 차이 드러내"
(홍콩=연합뉴스) 윤고은 특파원 = 이달 초 중국을 다녀간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과 식사를 한 중국 여성 이코노미스트들이 현지 누리꾼들의 비판을 받은 것은 여성 인권에 대한 중국 내 분열을 드러낸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5일 지적했다.
SCMP는 옐런 장관이 방중 기간 온통 남성인 중국 관리들을 여러 차례 만난 것에 대해서는 대중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중국 여성 경제인 몇명과 한 차례 오찬을 하자 소셜미디어에서 참석한 여성들을 '반역자'라고 비판하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낙인찍었다고 짚었다.
미국 재무부와 외신에 따르면 옐런 장관은 지난 8일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경제학자와 기업인, 작가 등 중국 여성들과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는 중국의 경제와 지도부를 포함한 중국 일터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늘릴 기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또 옐런 장관은 "나는 언제나 내가 그 방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일 때가 많다"며 "여러분 중 많은 분도 의사 결정 테이블에서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SCMP는 "엄격히 검열되는 중국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비판이 거세게 이뤄진 것은 서방과의 긴장 속 중국에서 커지는 민족주의와 중국 당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중국 공산당은 페미니즘을 서방 이념의 산물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이어 "분석가들은 해당 오찬을 둘러싼 논란이 지도부가 남성으로만 채워진 중국 공산당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젠더 다양성을 확보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간 여성 인권에 대한 견해의 깊은 차이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옐런 장관과 중국 여성 경제인들 간 오찬에 대한 비판은 온라인에 해당 식사 자리 사진 한장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
당시 9명의 참석자 중 류첸 이코노미스트그룹 중화권 회장은 트위터에 "옐런은 영감을 주는 역할 모델"이라며 오랫동안 그를 존경했고 그와의 식사가 영광이었다고 썼다.
또다른 참석자인 작가 하오징팡은 비판 여론이 일자 현지 소셜미디어 웨이보를 통해 옐런은 중국에 우호적이었다고 응수했다.
해당 오찬 사진과 참석자들의 소셜미디어 글은 중국 온라인에서 퍼져나가면서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오찬 자리에서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비판하는 쪽에서는 참석자들을 페미니스트, 반역자, 미국 첩자라고 불렀다.
심지어 푸단대의 선이 교수는 "공짜 식사라는 것은 없다"며 "그들은 대가로 KPI(핵심성과지표)들을 내놓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한 여성들이 미국 정부에 뭔가를 제공했어야 했을 것이라는 의미인데, 해당 글에는 지난 9일부터 나흘만에 8천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SCMP는 "선 교수의 발언은 중국 민족주의자들과 정부 관리 양쪽이 널리 공유한 인식을 부추겼다"며 "그것은 미국 당국이 중국 정부와 중국 국민을 구별해 공산당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 한다는 인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옐런 장관의 해당 오찬 훨씬 이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페미니즘을 서방과의 이념 대결의 렌즈로 바라보며 불신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발간된 시 주석의 2012∼2023년 연설문집에 따르면 2018년 11월 시 주석은 중화전국부녀연합회 간부들에게 당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주문하며 '외국 페미니스트 단체'나 '부유한 여성 클럽'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옐런 장관은 25명인 바이든 행정부 수뇌부에 있는 13명의 여성 중 한명이며 미 재무부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반면 지난해 10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중앙정치국(총 24명)은 25년 만에 처음으로 전원 남성으로 꾸려지며 젠더 다양성에서 '퇴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앙정치국에는 1987∼1997년을 제외하고 항상 최소 1명의 여성 위원을 둔다는 불문율이 유지됐지만, 시 주석의 1인 체제가 공고화된 20기 중앙정치국에서 이는 깨져버렸다.
205명으로 구성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는 여성이 11명 포함됐는데 이 역시 이전보다 나아진 게 아니다. 2017년 중앙위원회는 총 204명 중 10명이 여성이었다.
옥스퍼드대 중국센터 조지 매그너스 연구원은 옐런 장관의 오찬에 대한 누리꾼의 비판은 경악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SCMP에 "옐런은 이틀간 10시간 동안 중국 최고 남성 지도자들과 논란 없이 양자 회담을 이어갔다"며 "그러나 경제 이슈와 정책을 논하고자 소수의 여성과 만났더니 항의가 쏟아졌고 참석자들에는 반역자라는 비판이 제기됐다"고 지적했다.
SCMP는 시 주석이 2012년 집권 이래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해왔고, 이같은 발언은 최근 중국의 출산율이 낮아지고 여성의 전통적 돌봄 역할이 권장되면서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하이의 정치 과학자 천다오인은 중국 관영 매체들이 옐런 장관과 여성 경제인들의 오찬에 대한 비판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중국 당국이 사전에 해당 모임을 알고 있었고 진행을 허가했음을 시사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몇몇 인터넷 핵심 오피니언 리더들이 민족주의의 파도에 편승하기로 한 것은 반미와 반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페미니즘은 서방의 음모라는 중국 당국의 인식과 일치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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