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필리핀 경찰에 살해된 한인 유족과 본국 정부의 역할

입력 2023-07-29 07:07  

[특파원 시선] 필리핀 경찰에 살해된 한인 유족과 본국 정부의 역할



(하노이=연합뉴스) 김범수 특파원 = 지난달 6일 필리핀 앙헬레스 법원에서는 2016년 한인 사업가 지익주씨(당시 53세)를 납치·살해한 필리핀 전직 경찰관들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법원은 이날 경찰청 마약단속국(PNP AIDG) 소속 전 경찰관인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을 지낸 제리 옴랑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사벨의 상관이자 마약단속국 팀장을 지낸 라파엘 둠라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이 나오자 지씨의 부인 최경진(56)씨는 법정에서 쓰러졌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으나 심각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다.
전날 사건 전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재판 직전에 납치 현장에 함께 들렀던 기자도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최씨는 남편이 숨진 뒤 홀로 필리핀에 남아 사건 실체 규명과 범인 처벌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2016년 10월 18일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필리핀 한인사회뿐 아니라 많은 현지인을 충격에 빠뜨렸었다.
현직 경찰이 무고한 한인을 납치한 뒤 살해했을 뿐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잔인하고 치밀한 범행 수법은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지씨는 사건 당일 오후 2시께 앙헬레스 소재 자택에서 가정부와 함께 경찰에 의해 납치됐다.
당시 범인들은 지씨를 본인의 차량에 강제로 태워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데려간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다음날인 19일 오전에는 인근 칼로오칸시의 한 화장장에서 지씨의 시신을 소각하고 유해를 화장실에 유기하는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로부터 6년 8개월이 지난 뒤에야 사법 당국이 범인들이 단죄하자 최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특히 검찰이 주모자로 지목한 전직 경찰 간부 둠라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큰 충격을 받고 결국 혼절했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변의 한인들은 최씨가 겪은 아픔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날 앙헬레스 법원에는 20명이 넘는 한인 동포들이 최씨를 위로하고 재판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들은 재판 방청석에 들어가지 못하자 맞은편 회의실에 모여서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최씨는 이들에게 생수를 한 병씩 나눠주면서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며 판결이 난 뒤 다시 오겠다"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법정에 들어갔다.
이날 주필리핀 한국대사는 재판 결과를 직접 듣기 위해 법정에 왔으나, 교민들이 모여있는 회의실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판결이 난 뒤 곧바로 법정을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새로 부임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경찰 영사가 회의실에 들어와 침통한 얼굴로 재판 결과를 공지하고 나갔을 뿐이다.
이를 두고 교민들 사이에서는 '아쉬운 처신'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최씨는 "전임 경찰 영사는 범인 단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서도 "하지만 대사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교민은 "지익주씨 피살은 한인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라면서 "대사관이 사건 처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동포들이 함께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 대사가 오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전했다.
필리핀 검찰은 1심 결과에 불복해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도 이번 사건의 실체 규명과 둠라오 등 관련자 처벌을 위해 법정 투쟁을 계속하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다음 달 말에는 한국에 들어가 관계 기관을 방문해 본국 정부 차원에서 실체 규명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2012년 이후로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인 살해 사건은 총 57건에 사망자는 63명에 달한다.
그러나 정식 재판을 통해 실형이 선고된 것은 지익주씨 피살 사건이 처음이다.
최씨는 판결 다음 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저희 신랑이 왜 필리핀 경찰청에서 그렇게 무참히 살해됐어야 하는지 꼭 그 이유를 규명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면서 눈물을 흘린 바 있다.
고인이 된 남편을 마음에 묻고 현지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최씨를 비롯해 현지에서 살해된 무고한 재외동포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지원에 나서는 본국 정부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bums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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