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 빠진 유럽 최대경제국…WSJ "제조업 호황 안주해 시대 흐름 놓쳐"
자유무역 퇴조·과도한 규제·분열된 정치의 '퍼펙트스톰' 직면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불렸던 독일 경제가 장기 침체의 늪 가장자리에서 비틀대고 있다.
탈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 확대로 수출 주도 성장이 어려워진 와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란 악재가 거듭 닥쳐온 결과다.
29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전 세계 주요 경제국 중 유일하게 독일이 경제 역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미국과 서방의 제재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러시아마저 성장세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는데, 독일은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독일이 이처럼 부진한 경제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된 주된 원인으로는 제조업 제품 수출 호황에 안주해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실패했다는 점이 꼽힌다.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 경제난에 직면한 독일은 급속한 산업화를 진행하던 중국에 공작기계 등 자본재와 차량 등을 대거 수출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문제는 이후에도 디지털 기술 등 신(新)산업 투자를 소홀히 한 채 자동차와 기계, 화학 등 구(舊)산업 위주 경제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독일의 유일한 소프트웨어 대기업인 SAP만 봐도 1975년에 설립된 회사라고 WSJ은 지적했다.
중국에서 사회기반시설과 부동산 투자의 경기부양 효과가 떨어지면서 고성장 시대가 결국 막을 내렸고, 독일도 더는 중국 시장에서 재미를 보기 힘들게 됐다.
오히려 한때 독일 제품을 사들이는 고객이었던 중국 기업들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로 부상했다.
전기차 산업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거듭된 경고에도 독일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가 지닌 가능성을 무시한 사이 중국 전기차 기업들이 거세게 치고 올라온 것이다.
독일 최대 자동차제조업체 폭스바겐 최고 임원들은 지난달 내부 전화회의에서 비용 증가와 수요 감소, 테슬라와 중국 전기차 등 경쟁사의 부상이라는 '퍼펙트 스톰'(복합위기)에 직면했다면서 "지붕에 불이 붙은 격"이라고 현 상황을 진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독일의 제조업 생산량과 국내총생산(GDP)은 2018년부터 정체 상태다. 회계·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최근 보고서에서 2019년 이후 독일 자동차 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지난 20년간 기록한 수익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WSJ은 "20년 전 독일은 빈사 상태였던 경제를 되살려 세계화 시대의 제조업 강국이 됐다. 세월이 변했고, 독일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독일 키엘 세계경제연구소(IfW)의 모리츠 슐라리크 이사장은 "우리는 많은 도전이 있었던 10여년간 계속 잠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20년 전보다 국내외적 환경이 훨씬 나쁘다는 점이다.
세계 정세부터 독일과 같은 수출 주도 경제에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 중국과 유럽연합(EU)에 고관세를 매기면서 시작된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 움직임과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병합과 이에 따른 서방의 제재 등으로 자유무역이 위축되고 있어서다.
독일 국내적으로는 공공부문 투자 위축으로 교통·통신 등 사회기반시설이 심각하게 노후화했고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비효율, 과도한 규제로 정부가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WSJ은 "(독일) 정부가 팩스 기기에 계속 의존하는 건 전국적인 농담거리가 됐다"고 전했다.
독일을 떠나거나 시설을 외국으로 이전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화이자와 함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독일 바이오앤테크는 독일 정부의 규제 탓에 연구활동을 이어갈 수 없다면서 최근 연구 및 임상시설 일부를 영국으로 이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올해 3월에는 다국적 산업용 가스회사 린데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서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독일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투자 유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미국 뉴욕 증시에만 상장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독일의 국가 브랜드 파워가 약해졌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유럽 내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물가가 연쇄적으로 상승하고 화학산업의 경우 존폐를 위협받을 지경에 놓인 점도 문제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역시 독일의 반등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독일에서는 기업의 약 43%가 구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직원을 새로 고용하는 데 드는 기간이 평균 6개월에 이른다고 WSJ은 전했다.
그런데도 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치권은 여러 조각으로 갈려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다수당을 점하지 못한 채 다수의 정당이 난립, 연정이 불가피해지면서 정부 내에서조차 감세나 정부투자 확대 등 주요 정책과 관련한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강한 추진력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WSJ은 최근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여론조사에서 집권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을 앞서기도 했다면서 "독일의 분열된 정치지형은 20년 전처럼 광범위한 변화를 끌어내는 걸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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