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서 끌려나온 후 입원 의식불명…당국은 '저혈압 쇼크' 주장
이란 안팎서 "정부, 관련 정보 투명하게 공개하라" 잇단 목소리
(서울=연합뉴스) 유한주 기자 = 이란에서 한 10대 소녀가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폭행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이란 정부를 향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이란에서는 지난해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 (당시 22세)가 의문사한 사건으로 반정부 시위가 촉발돼 이란 전역으로 확산했다.
5일(현지시간)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란 안팎에서는 현지 당국이 아르미타 가라완드(16)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란 반정부 단체들은 먼저 가라완드가 지난 1일 오전 수도 테헤란 지하철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것과 관련해 폐쇄회로TV(CCTV) 전체 영상 등 관련 정보가 모두 공개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앞서 언론에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가라완드는 당시 히잡을 쓰지 않고 지하철에 탑승했다가 몇 초 뒤 다른 여성들에게 이끌려 하차해 역 바닥에 눕혀졌다. 가라완드는 이때부터 의식이 없던 걸로 보인다고 WSJ은 전했다.
노르웨이에 본부를 둔 쿠르드족 인권 단체 헨가우는 그가 도덕 경찰로 불리는 '지도 순찰대' 여성 대원들과 히잡 규정 위반 문제로 충돌한 뒤 혼수상태로 입원했다고 전했다.
이란 당국은 그가 저혈압 쇼크로 실신해 금속 물체에 머리를 부딪혔다는 주장을 폈으나 이를 증명할 지하철 차량 내부 폐쇄회로TV(CCTV) 영상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지 인권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는 "정부의 행동은 아르미타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걸 막으려는 시도"라고 소셜미디어(SNS)에서 비판했다. 모하마디는 '반국가 선전물 유포' 혐의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이란인권센터' 부소장 재스민 램지는 "만약 이 사건이 그들(정부) 주장처럼 간단하다면 왜 이렇게 많은 제한과 비밀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 샤디 아민은 이란 당국이 가라완드 부모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면서 "이제 진실을 찾는 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가라완드의 부모는 이란 국영 매체와 인터뷰에서 딸이 저혈압으로 쓰러졌다고 밝혔으나 인권 단체는 인터뷰 현장에 보안 당국 측 고위 관리가 입회해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다.
안나레나 배어복 독일 외무장관도 이란 당국이 가라완드의 부모가 딸을 면회하는 것조차 금지했다면서 "(부모는) 카메라 앞이 아니라 딸의 병상 옆에 있을 권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국이 이번 사건과 관련한 언론 취재를 제한한 데 대한 비판도 나왔다.
이란 개혁 성향 신문 '샤르그'는 자사 기자 가운데 한 명이 가라완드가 입원 중인 병원에서 그의 부모를 인터뷰하다가 체포돼 24시간 동안 구금됐다고 밝혔다.
테헤란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모흐센 보르하니는 "투명성이란 언론인들이 16세 소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보도하는 걸 허용하는 것을 뜻한다"고 엑스(X·옛 트위터)에서 지적했다.
이란 교사 노조는 4일 성명에서 교육부 보안 책임자가 가라완드가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를 찾아 교직원들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 해고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반 친구들에게도 침묵하라는 위협이 가해졌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이란 학부모들은 이번 일이 '제2의 아미니 사태'로 번질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학생인 딸을 둔 파리바(46)는 "딸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 딸을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면서 "딸은 히잡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요즘 많은 소녀는 매우 용감해졌다"고 말했다.
배어복 외무장관도 "다시 한번 이란의 젊은 여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면서 아미니 사건을 언급했다.
hanj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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