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재건축 본격화하자 전문성 문제 불거져…주민 갈등 유발에 잡음도
시공사 의존 커 자금조달 등 고유 역할론 '흔들', 수수료 과다 논란까지
정부, 조합 대체재로 신탁 정비사업 활성화 추진…전문가 "제도보완이 먼저"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추진 단지에서 부동산 신탁회사와 관련한 잡음이 커지고 있다.
'전문성'을 앞세워 조합 사업의 문제를 해결해줄 대안으로 부상한 신탁사들이 오히려 전문가답지 못한 일 처리와 대응으로 구설에 오른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신탁방식의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해 신탁사에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부여하고 신탁사 선정을 용이하게 하는 등의 제도개선에 나서면서 우려를 낳고 있다.
부동산 신탁사들이 혼탁한 정비사업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 전문성 논란 이어 분란의 중심이 된 부동산 신탁사
최근 서울시와 영등포구청의 잇단 시정 지시로 시공사 선정 절차가 중단된 서울 여의도 한양아파트.
KB부동산신탁이 사업 시행자 자격을 얻어 신탁방식 재건축이 진행 중인 곳으로, 정비계획 수립 단계에 있는 초기 사업장이다.
지난달 현대건설과 포스코이앤씨가 이곳의 시공권을 따내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이중 오랜 기간 수주에 공을 들여온 포스코이앤씨는 초기 사업자금으로 입찰보증금 150억원을 포함해 500억원을 대여하겠다고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세부적으로 500억원 중 350억원은 3.8%대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로, 나머지 150억원은 시공사의 조달금리(4∼5%대 추정)로 대여하는 조건이다.
입찰 보증금은 최종 시공사로 선정되면 정비사업의 사업비로 전환되는데, 포스코이앤씨 측이 제시한 500억원이면 추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을 받아 이주비 등 대규모 자금조달을 하기 전까지 초기 사업비로 충분한 자금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부동산 신탁사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사업비 조달이다. 조합 방식과 달리 신탁사의 능력으로 재원 마련이 가능해 건설사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신탁 방식도 실제 현장에선 시공사에 자금조달을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신탁사의 정비사업 자금 조달 금리는 보통 5∼6%대로 대형 건설사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공사를 선정할 때 조합이든 신탁사든 건설사에 높은 입찰보증금과 경쟁력 있는 사업비 조달 계획을 요구하고, 그 자금으로 초기 사업비를 충당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이후 규모가 큰 이주비·사업비 등은 HUG 보증으로 시중은행에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하기 때문에 신탁사의 자금이 투입되는 경우는 시공사 선정 전까지 소요되는 일부 자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건설업계에는 '밥상은 건설사가 차리고, 생색은 신탁사가 낸다'는 불만이 나온다.
신탁사 역할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최근 전문성 논란으로 번졌다.
서울시와 영등포구청이 여의도 한양 아파트 재건축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부지 매수 협의가 되지 않은 단지 내 한양 상가(롯데마트) 부지를 사업 부지에 포함해 설계했다는 이유로 시정지시를 내리자, 사업시행자인 신탁사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정비업계의 한 관계자는 "신탁사의 미숙한 업무처리로 오히려 롯데마트의 협상력만 키워줘 상가 부지 매수 대금이 당초 계획의 2배로 늘 것이라는 소문이 나온다"며 "이로 인한 주민들의 손실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양천구 목동7단지는 현재 재건축 추진위원회가 둘로 나뉜 채 신탁사 선정을 놓고 주민 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기존에 안전진단 등 초기 절차를 진행해온 재건축 준비위원회(재준위)의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정비사업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지난달 재준위 측과는 무관하게 코람코자산신탁과 신탁사 예비 업무협약(MOU) 체결한 것이다.
이는 신탁사를 선정할 수 있는 주체와 선정 시기 등에 대한 법적·제도적 기준이 없다 보니 발생한 문제다.
목동7단지 재준위 측은 현재 "아직 신탁으로 갈지, 조합방식으로 갈지조차 결정되지 않았는데, 소유자 동의 없이 진행한 일방적인 신탁사 선정은 무효"라며 반발하고 있어 신탁사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는 한 사업 지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 '둔촌 주공' 사태가 키운 조합 불신…신탁사 권한 확대
부동산 신탁회사는 원래 토지 소유자가 부동산 개발 노하우나 자금이 부족할 경우 토지주로부터 위탁받은 토지의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공사 발주 및 자금 관리·운영을 해주는 금융회사다.
신탁사가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의 조합을 대신해 사업시행자(신탁시행자 방식) 또는 시행자 대행(신탁대행자 방식)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2016년 3월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개정 이후다.
정비사업 조합의 비리가 끊이지 않고, 조합원 간 반목으로 사업이 지연되거나 차질을 빚자 신탁사의 정비사업 참여를 허용해 사업을 보다 신속하고 투명하게 진행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정식 인가를 받아 영업 중인 부동산 신탁사는 총 14개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정비사업에 참여하는 신탁사는 한국토지신탁, 한국자산신탁 등 11곳으로, 이들이 전국에서 진행 중인 신탁 방식의 도시정비사업은 200여곳에 달한다는 게 협회 측의 설명이다.
서울시 정비사업포털 '정비사업 정보몽땅'에 등록된 서울지역 재개발·재건축, 가로주택정비 등 정비사업(조합 청산단계 제외) 추진 단지는 총 851곳으로, 이 가운데 신탁 방식(시행·대행 방식 포함)을 선택한 정비사업장은 26곳으로 전체의 3% 정도다.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은 2016년 제도 도입 당시만 해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신탁 방식으로 준공까지 이른 사례도 없다.
그러다 지난해 터진 '둔촌 주공' 재건축 공사 중단 사태가 신탁 방식의 몸값을 높여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정부는 둔촌 주공 사태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을 키우기 위해 제도개선을 추진 중이다.
골자는 신탁사에 대해 공공정비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부터 도심 주택공급 확대를 공언해온 정부는 지난해 8·16대책에서 민간 신탁사와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에 도심·역세권 고밀 복합개발을 허용하고, 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신탁사에 조합 대신 정비구역 지정을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정비구역 지정과 사업계획을 동시에 수립할 수 있도록 허용해 조합방식 대비 2∼3년가량 사업 기간 단축이 가능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 9·26 주택공급 활성화 대책에서는 신탁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됐던 '토지 면적 3분의 1 이상 신탁' 조항을 없애고, '토지주의 4분의 3 이상 동의'만으로 시행자 지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을 신탁함으로써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자 걸림돌을 없애준 것이다.
정부는 신탁사의 '전문성'을 활용하면 조합 비리나 시공사와의 공사비 갈등을 줄이고 사업 속도와 투명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조합이나 공공정비에 이어 신탁 방식이 정비사업의 또 다른 선택지로써 도심 공급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특히 사업성이 낮거나 중소 건설사가 시공사로 참여해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재개발·재건축 단지에서는 신탁사의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 전문가 "신탁 순기능 활용하려면 제도 보완이 먼저"
그러나 신탁 방식 활성화에 앞서 미비한 제도 보완이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선 신탁사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만큼 사업에 실패했거나 조합에 손실을 가하는 경우 그에 대한 책임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정비업계의 한 관계자는 "신탁이 조합에 손해를 끼치거나 건설사와 공사비 협상에 실패해도 신탁사에는 마땅히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며 "신탁사의 손해배상 규정이 있지만 주민들이 시비를 가리기가 힘들고, 배상받기 위해서는 긴 소송을 거쳐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설명했다.
신탁수수료가 과도하다는 지적도 많다.
일반 개발사업과 달리 정비사업은 시공사의 자금 의존도가 높은 데 비해 무조건 분양수입이나 사업비에 비례해 단지가 클수록 높은 신탁수수료를 부담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전문성이 있는 신탁사가 사업시행자로 참여해도 일반 조합 방식에서 쓰는 도시정비·설계·철거 및 이주관리 등 각종 용역업체는 똑같이 선정하고, 실제 업무도 용역업체들이 하니 비용은 더 늘어난다.
현재 신탁수수료는 중개수수료와 달리 정부 기준 없이 업계 자율이다.
사업비 또는 분양수입 등에 비례한 요율제가 일반적이고, 일부 정액제 또는 수수료 상한제를 복합적으로 적용한다.
업계에 따르면 과거 사업비의 4%로 시작한 신탁수수료는 최근 경쟁이 심화하며 1% 후반에서 2%대로 내려왔지만, 신탁사가 부담하는 사업 리스크(위험부담)에 비해 여전히 높다는 불만이 많다.
현재 여의도 한양아파트의 신탁 수수료는 180억원 정액이며, 여의도 공작과 시범아파트는 조합원과 일반분양 수입의 비율에 따라 각각 210억원, 440억원으로 예정돼 있다.
목동신시가지 7단지의 경우 예상 사업비가 7조원대에 달해 신탁수수료를 1%만 잡아도 700억원, 2%면 1천4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주민들은 보고 있다.
신탁 계약상의 독소조항도 문제로 지적된다.
그동안 신탁사들은 신탁계약 해지 요건을 '주민 100% 동의'로 제한해 신탁 계약 해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문제 제기가 많았다.
정부는 이에 지난달 처음 공개한 신탁 표준 계약서에서 주민 전체가 아닌 75%(4분의 3) 이상 동의만 있으면 신탁계약 해지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일반 조합방식의 중대 사항 변경 요건인 '조합 3분의 2 찬성'과 비교해 여전히 해지 요건이 까다롭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준 계약서에서 공사 착공 이후 신탁사가 주민이 위탁한 신탁 재산을 담보로 자금조달이 가능하도록 명시한 것에 대해서도 "자금(재원) 조달은 신탁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데, 주민의 재산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한다면 왜 신탁사가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J&K도시정비 백준 대표는 "신탁사의 도움을 받으면 조합원 간 갈등이 줄어 사업 추진 속도가 빨라지고, 시공사와의 공사비 협상에도 유리한 순기능이 있지만, '옥상옥'의 개념도 있다"며 "신탁사업 활성화에 앞서 미비한 제도부터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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