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직접 증거 없어도 오너 제재 합당' 취지 판결…"간접 관여 가능"
재계 '상위법 위임 범위 넘어' 지적…공정위 "대법 판례와 건의 모두 반영"
(세종=연합뉴스) 박재현 기자 = 일감 몰아주기에 관여한 총수 일가를 원칙적으로 고발하는 지침 개정을 추진하다 재계 반발에 '일보후퇴'한 공정거래위원회가 새로운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한 내부 논의를 시작했다.
중대한 사익편취 행위를 엄단하겠다는 지침 개정 취지를 살리면서도 재계에서 나온 건의 사항을 반영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심 중이다.
◇ 대법원 "의사결정에 지배적 역할 하는 오너, 간접적 관여 가능" 판단
11일 업계와 관련 부처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일까지 행정 예고한 공정거래법 고발 지침 개정안 중 일부를 수정·보완하고 있다.
행정 예고된 개정안은 공정거래법상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 등의 행위(사익편취)'로 사업자(법인)를 고발하는 경우 이에 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같이 고발하도록 했다.
조사를 통해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하다고 밝혀진 특수관계인만 고발하도록 한 현행 규정을 수정한 것이다.
공정위가 이 같은 지침 개정을 추진한 것은 지난 3월 대법원이 일감몰아주기에 대한 오너의 직접적인 지시 증거가 없는 경우더라도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법 해석을 내놨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앞서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등이 공정위를 대상으로 한 시정명령 취소 행정소송에서 이 전 회장 측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 했다.
공정위는 2019년 태광 계열사들이 총수 일가가 100% 보유한 업체 '티시스'에서 생산한 김치를 고가에 사들이고, 역시 총수 일가가 소유한 '메르뱅'에서 합리적 기준 없이 와인을 매입한 사실을 적발했다.
공정위는 이 전 회장과 계열사들을 검찰에 고발하고, 이 전 회장에게는 시정명령도 부과했다.
이 전 회장 측은 일감몰아주기 등 부당 행위에 개입한 사실이 없다며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원심은 계열사들에 대한 시정명령·과징금은 정당하지만, 이 전 회장에게 내려진 시정명령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 전 회장이 김치·와인 거래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그러나 원심을 뒤집고 이 전 회장에 대한 제재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김치 거래가 특수관계인의 부의 이전 및 지배력 강화, 경영권 승계 등에 기여했으며 태광의 의사결정에 지배적 역할을 하는 이 전 회장은 여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 관여를 할 수 있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즉 직접적인 지시 증거가 없더라도, 이 전 회장이 이 거래에 관여했다고 볼 정황이 충분하므로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이러한 취지를 반영해 직접적인 지시·관여 여부를 주로 따지는 '중대한 위반'이라는 문구를 없애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마련했다.
◇ 재계, '상위법 위배' 반발…법 위반·개입 정도 종합 고려 방안 추진
행정예고 이후 재계는 개정안에 반발하며 전면 재검토를 요청했다.
재계 주장의 핵심은 개정안이 상위법인 공정거래법의 위임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공정거래법은 일감몰아주기 사익편취 행위와 관련해 위반 정도가 객관적으로 중대·명백한 경우에만 특수관계인을 고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하위 지침인 고발 지침에서 관여 여부에 대한 명백한 입증 없이 특수관계인을 원칙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상위법인 공정거래법에 위배된다는 게 재계의 입장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위반 정도가 중대 명백한 경우'라는 문구를 '특수관계인의 지시·관여가 중대 명백한 경우'로만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특수관계인의 관여 증거가 상대적으로 불분명하더라도, 법 위반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규모가 매우 크다면 이 역시 위반 정도가 중대 명백한 경우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감몰아주기로 인한 부당이득이 대부분 오너 등 특수관계인에게 귀속되는 구조인 만큼, 위법 행위로 가장 큰 혜택을 본 당사자를 고발하지 않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지적도 있다.
공정위는 재계의 지적에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보고 개정안 문구를 수정·보완해 고발 지침을 다시 마련할 계획이다.
현재 유력한 안은 법 위반 정도와 지시·관여 여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중대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특수관계인의 지시·관여 여부에 대한 입증 조건을 유지하되, 사익편취 행위로 귀속된 부당 이득의 규모가 매우 크다면 입증 관련 조건을 일부 완화하는 방안이다.
추가 고려사항으로서 지침상 원칙 고발 대상은 아니지만 고발할 수 있는 경우와 원칙 고발 대상이지만 고발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도 명시한 조항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관계자는 "재계 건의와 대법원판결 취지를 모두 반영해 적정한 법 집행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고발 지침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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