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군 관리부터 선정까지 승계 절차 문서화…투명성·공정성 제고
'거수기' 이사회도 독립성 강화…실효성은 숙제로 남아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금융당국이 12일 은행권 지배구조 관련 '모범안'을 제시한 것은 최고경영자(CEO) 교체 때마다 혼란과 논란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모범안의 핵심은 CEO 승계 절차를 임기 만료 최소 3개월 전에는 개시해 충분한 검증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사회 규모와 구성도 손질해 실질적인 경영진 견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CEO 선임과 관련한 자질 논란 및 시비가 줄어들 것이란 기대가 나오지만 강제 규정이 아닌 권고 성격인 만큼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란 지적도 나온다.
◇ CEO 바뀔 때마다 '잡음' 무성…관치 논란부터 '황제 연임'까지
국내 금융지주사는 뚜렷한 대주주(주인)가 없는 지배구조 탓에 CEO 선임 과정 때마다 잡음과 논란을 반복해왔다.
지배주주가 없는 상황에서 금융지주사 회장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로 이사회를 구성해 참호를 구축하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셀프 연임'을 이어오는 후진적인 구조를 드러내 왔다.
이 때문에 CEO 교체 때마다 '누구 라인에서 밀고 있다'라거나 '누구 라인에서 배제됐다'는 식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들도 무성했다.
지배 주주가 없다 보니 정치적 외풍에도 취약했다.
CEO 후보자가 공개되면 역량 검증보다는 '낙하산' 시비나 '코드 인사' 논란이 먼저 불거지기 일쑤였다.
작년 말 NH농협금융과 우리금융, 신한금융의 회장들 임기 종료를 앞두고 연임 시도나 정치권 낙하산 인사 가능성 등과 관련해 혼란이 커지자 이복현 금감원장이 이례적으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들과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금감원장은 당시 8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과 간담회를 열고 "CEO 선임이 합리적인 경영승계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당부드린다"고 주문한 바 있다.
CEO 선임과 관련한 불필요한 시장 혼란을 줄이고 금융사 경영 합리화를 위해 금융당국이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됐다.
◇ 평균 45일에 불과한 승계 절차 내실화…이사회 전문성도 제고
이날 금감원이 발표한 '은행권 지배구조 모범관행(best practice)'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다.
금감원은 은행권, 연구기관 등과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바람직한 지배구조를 위한 30가지 원칙을 제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선 CEO 선임 절차와 관련해서는 후보군 관리부터 육성, 최종 선정까지를 포괄하는 종합 승계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문서화하도록 했다.
승계 절차가 형식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경영 승계 절차를 최소 임기 만료 3개월 전에 개시하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단계별로 충분히 역량을 검증하고 평가하라는 취지다.
금감원이 국내 8개 은행지주 CEO 선임·연임 사례를 살펴본 결과 승계 절차 개시 후 최종후보 결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5일에 불과했다.
숏리스트(압축된 후보 명단) 후보에 대한 대면 평가는 단 1번의 인터뷰나 발표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1~2년 전부터 승계를 준비하는 글로벌 은행들과 차이가 크다.
모범관행은 CEO 상시 후보군을 마련해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했으며, 승계 절차 개시 후 해당 리스트 이외의 사람이 CEO 후보에 포함될 경우 추천자 및 사유를 공시하도록 했다.
독립적인 위치에서 경영진을 견제하는 목적의 이사회 기능도 제고하도록 했다.
금융지주 이사회는 대부분의 안건에 찬성만 하며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모범 관행은 이사회 내 소위원회 증가 추세에 대응해 은행별로 적정 수의 이사를 확보하도록 했다.
국내 은행 사외이사 수는 평균 7~9명으로 글로벌 주요 은행 대비 매우 적은 수준이라고 금감원은 판단했다.
이사회 전문 분야와 직군, 성별 등과 관련해 전문성 및 다양성 확보 방안도 마련하도록 했다.
금감원은 사외이사 직군이 학계(37%) 중심으로 편중돼 있으며, 여성 이사 비중(12%)도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획일적인 '2+1년(2년 임기 뒤 1년씩 연장)' 임기 정책도 정비하도록 했다. 임기가 한꺼번에 종료되는 현행 임기 구조는 이사회 안정성을 저해하고 경영진 견제 기능이 약화한다는 비판을 반영한 것이다.
◇ 이르면 내년부터 적용…관치 수단·실효성 지적도
금감원은 전체 은행권에 이 같은 모범관행 최종안을 공유하고 은행별 특성에 적합한 자율적 개선을 유도할 예정이다.
은행권은 이사회와의 논의를 거쳐 과제별 개선 로드맵을 마련해 이르면 내년부터 적용할 계획이다.
다만 이번 모범관행은 말 그대로 '모범안'이기 때문에 안 지켰을 경우 제재 등 강제성 있는 수단이 뒤따르진 않는다.
박충현 금감원 부원장보는 "지배구조 모범관행은 법이나 규정에 의한 게 아니라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며 "지주나 은행이 자율적으로 상황에 맞게 개선해 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이 때문에 모범관행이 실제 CEO 선임 절차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지주 회장에게 집중되는 강력한 권한을 일부 손봐야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은행지주 회장이 책임에 비해 과도한 보수를 받는 측면이 있다 보니 회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몰리는 것"이라며 "(CEO 선임과 관련한) 좋은 절차와 형식을 만들어 놓아도 왜 작동하지 않는지에 그 원인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CEO 선임과 관련한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또 다른 '관치' 의심받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는 "제도 개선 방향은 바람직한 것 같다"면서도 "다만 이러한 모범안을 제시한 금융당국 스스로도 앞으로 인사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점을 시장에 더 명확하게 선언하고 알려야 오해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j99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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