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 속 출범한 극우 괴짜 밀레이 정부, 잇단 개혁 발표하며 '속도전'
기본식자재 평균 100% 이상 ↑…매시간 오르는 가격에 시민들 망연자실
"취임 일주일밖에 안 됐으니 기다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만성적 경제난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선택을 받은 극우 자유경제 학자 출신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전임 좌파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지 17일(현지시간)로 1주일이 지났다.
연 160%를 상회하는 살인적 물가상승과 국민의 44%가 빈민이라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 취임한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곧바로 잇단 경제개혁 조치를 발표하며 경제난 극복 속도전에 나서고 있다.
밀레이 정부의 이런 발 빠른 개혁 드라이브 이후 시민들은 예전보다 더 가파르게 치솟는 물가에 직면하면서 위기극복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확신하기보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레이 대통령도 취임 연설에서 자신이 최악의 경제 유산을 전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았다며 집권 초기 몇 달간 극심한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고물가)을 겪을 수 있다고 예고했다.
그는 민간연구소의 전망을 언급하면서, 12월과 1월 월간 물가상승률은 20∼40%에 달할 것이라며 경제난 극복을 위한 개혁과정에 어쩔 수 없이 고통이 뒤따를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연간 1만5천%에 이를 수 있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재정 개편은 불가피하다며 경제개혁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역설했다.
막상 재정 개편을 비롯한 여러 개혁 조치가 발표되자마자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는 '역설적 상황'이 현실이 되면서 앞날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현 정부는 이런 위기의 본질을 전 정부가 남긴 유산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밀레이 정부가 공식 환율을 100% 올리고 정부가 나서 가격을 통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발표한 후에 모든 가격이 동시에 급격하게 올랐음을 입증하고 있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밀레이 정부의 개혁조치 발표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과 같은 자유경제 신봉자인 CEMA대학의 마리아노 페르난데스 경제학 교수는 이날 현지 매체 인포바에와의 인터뷰에서 "밀레이 정부가 하는 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돌입할 수 있는 실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환율을 100% 이상 올리고 한 달에 2%씩 크롤링 페그제도(기준 환율을 수시로 아주 작은 폭의 범위내에서 변경하는 제도)를 실시하는 것으로는 월간 30%에 이르는 물가상승률을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정부의 경제안정화 계획을 믿을 수 있는 '신뢰'가 필요한 데 현재 발표한 경제조치로는 이러한 '신뢰'가 형성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폭등하는 물가에 대한 민심의 걱정과 평가는 훨씬 더 크고 신랄했다.
"가격은 매일, 매시간 올라요. 선거 전에는 사재기도 있었지만 이젠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지난 16일 오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텅 빈 대형마트에서 매대에 물건을 채우던 직원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주말인 이날 동네 마트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트 직원들 숫자가 장을 보는 시민보다 많았다.
"지난 10월 본선 전에 사재기가 심했고 한동안 잠잠하다가 밀레이가 당선된 후 다시 한차례 사재기가 있었고 그동안 계속 가격이 가파르게 올라서 요새는 판매가 많이 하락했다"고 마트 직원이 귀띔해줬다.
채소코너에서 만난 70대의 마리아는 "(물건) 가격이 표현을 못 할 정도로 올라서 매일 필요한 것 위주로 한두 개씩밖에 살 수 없다"며 집어 들었던 과일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면서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지난 일주일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는 후아나(44)는 "인플레를 잡는다고 해서 뽑아줬더니 어떻게 물가가 이렇게 폭등할 수가 있냐"며 불평을 쏟아놓았다.옆에 있던 그녀의 동생 벨렌(39)은 "취임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으니 기다려봐야 되지 않냐"면서 "물가가 너무 올라서 걱정이긴 하지만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카탈리나(46)는 "지난주에 산 쌀 가격이 오늘 63%가 올랐다"면서 "2리터 생수가 어제 코토마트에서 770페소이고 까레푸에서 496페소여서 오늘 다시 까레푸로 사러 가니 558페소로 올랐다. 하루 만에 12.5%가 인상된 것"이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마트마다 같은 제품 가격이 달라서 매일 확인하고 사야 한다"며 급격한 가격 인상의 고충을 호소했다.
지난 15일 중앙청과물시장 단체(COMAFRU)는 과일과 채소 소매가격이 불과 며칠간 180∼633%까지 올랐다면서 소매업체들에 "소비자들에게 사기를 치지 말아라"라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과일과 채소의 도매가격은 그리 오르지 않았는데 소매가격은 과도하게 오른 면이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고 현지 매체 페르필이 보도했다.
시내의 작은 매점 주인인 후안(48)은 "이미 밀레이 취임 전에 50% 이상 가격이 올랐는데 경제정책 발표 후에 또 오르고, 휘발유가 40% 올랐다는 소식에 가격이 또 오르고…하루 종일 가격을 바꾸느라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가격 통제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뭔가 해야 하는 게 (필요한 게) 아닌지 현재 상황이 너무 우려스럽다"며 한숨을 쉬었다.
현지 매체 인포바에가 선정한 30여개 기본 식자재의 전망 가격은 평균 98.7%의 상승률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전망치일 뿐 마트에선 400% 상승을 넘는 가격도 찾아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큰 기념일은 성탄절과 새해전야다.
모든 상인이 기대하는 12월은 가장 큰 대목이고 12월 장사를 잘해야 판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여름 바캉스 기간인 1월과 2월 소위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인 지난 16일 오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거리는 성탄절을 일주일 앞둔 시점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가했다.
반면에 한인 도매매장이 즐비한 의류도매시장이 위치한 아베야네다 거리는 도매가격으로 옷을 사려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판매는 예년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글들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교민들의 온라인 대화방에는 "역대급 최악의 12월이다", "시민들은 생필품 살 돈도 없을 텐데 옷을 살 여력이 있을까" 등 믿을 수 없는 판매실적에 한탄하는 우려 글이 대부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 만난 디에고(49)는 자신을 변호사라고 밝힌 뒤 "이미 전 세계에서 실패한 신자유주의(Neoliberal) 정책은 이미 아르헨티나에서 실험했고 결과는 처참했는데 또다시 그 수렁에 빠진 것"이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밀레이는 카스타(기성 정치인, 기득권)가 개혁의 고통을 감수한다고 하더니, 결국 (고통은 고스란히) 노동자와 중산층의 몫이다"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익명을 요구한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UBA) 경제학 교수는 "밀레이 정책은 카를로스 메넴 정권(1989-1999)의 후속 같다. 경제규제완화를 외치며 국가 자산을 다 매각하고 태환 정책(1달러=1페소 고정환율제)으로 물가를 잡았으나, 경제침체, 높은 실업률과 외채 문제로 결국 경제 붕괴로 이끈 정책이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아직 밀레이 경제 정책이 다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데자뷔 현상처럼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면서 "경제학자로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한인 대화방에서 실시한 현재 상황에 대한 투표에서는 '매우 나쁘다. 더 안 좋아진다'보다 '매우 나쁘다. 좋아질 거다' 혹은 '버티면 좋아질 것이다' 라는 답변이 소폭 앞서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페르난도(55)는 "가격이 계속 올라서 두렵다. 월급으로 월말까지 버틸지도 모르겠고, 교통비가 1월부터 10배 이상 오른다는데 난 근교에서 수도로 오려면 기차와 버스를 타야 하는데 교통비 걱정이 크다"라면서도 "그래도 버티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경제학자인 엑토르(53)는 "수십년간 아르헨티나 경제는 재정적자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금융·외환시장이 매우 취약한 상황에서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현재 물가 폭등을 살펴보면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재정 균형을 이루고 상대가격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도기라고 보며, 발표된 정책은 임시정책으로 보여, 정확한 정부 정책 발표가 있기까지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앞서 밀레이 정부 취임 사흘째인 지난 12일 루이스 카푸토 신임 경제장관은 아르헨티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10가지 경제 비상 조처 패키지를 발표했다.
카푸토 장관은 아르헨티나의 현 경제상황을 수십년간의 만성적인 재정적자, 연 세자릿수의 고물가 그리고 중도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전 정권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차입한 440억 달러(57조 3760억원)의 외채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 달러 환율을 기존의 1달러당 400페소에서 800페소로 100% 인상하는 임시조치를 제시했다.
수출을 활성화해 고갈된 중앙은행 외화보유고를 안정시키고, 임시로 수출세를 늘려 재정적자를 해소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급격한 환율 인상은 물가 상승을 유발하며, 그 고통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밀레이 정부는 과감한 정부 조직 개편(18개 부처를 9개로 축소), 각종 보조금 삭제, 국영기업 민영화에 국영기업 비행기 및 정부 소유 그림까지 판매해서 국내총생산의 5%에 해당하는 정부 예산을 긴축하겠다고도 발표했다.
다행히 시장은 이러한 조치를 환영하면서 주식과 채권은 급등했고, 각종 환율은 하락해 일단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지지를 보여줬다.
취임 후 실시된 첫 여론조사에서 밀레이 대통령은 62%의 지지를 얻으면서 앞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확보한 득표율 55.6%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하지만, 경제 컨설팅 회사인 에콜라티나(ECOLATINA_의 12월 2주간 물가상승률은 평균 18.1%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현재 급등하는 물가 추세로 봐서는 이미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돌입한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새 정부의 숨 가쁜 개혁 행보 속에 아르헨티나의 민심은 "현 물가 급등이 우려스럽지만 아직 밀레이가 취임한 지 1주일밖에 안 되었으니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의견과 "지난 일주일이 1년 같이 끔찍했다.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체념이 어우러져 있었다.
sunniek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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