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규제 불만에 "EU 기준으로 완화"…사실상 '백기'
주요 농민단체들 "봉쇄 중단…투쟁 끝난 것은 아냐"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정부가 2주째 시위 중인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일(현지시간) 추가 재정 지원과 규제 완화 대책을 내놨다.
이에 주요 농민단체들은 지난달 18일 시작한 도로 봉쇄 시위를 중단하고 새로운 방식의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농민과 정부 간 줄다리기 끝에 농민이 잔뜩 '보따리'를 챙겨 농장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유럽연합(EU) 기준보다 과도하게 적용 중인 환경 규제책을 보류한다고 밝혔다.
아탈 총리는 "유럽과 프랑스의 기준을 일치시킬 것"이라며 "유럽의 다른 곳에서 승인된 물질을 우리만 금지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살충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에코피토 계획'을 일시 보류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에코피토 계획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2025년까지 살충제 사용을 50% 줄인다는 구상이다.
프랑스 농민들은 정부가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살충제 사용을 금지했다며 항의해왔다.
아탈 총리는 아울러 프랑스에선 금지된 살충제 티아클로프리드를 쓴 외국산 과일과 채소의 수입을 막기 위해 '세이프가드' 조항을 즉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EU가 2019년부터 이 살충제 사용을 금지했지만, 이를 쓴 농산물 수입을 막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아탈 총리는 또 우크라이나산 저가 농축산물 수입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EU에서) 가금류에 대한 세이프가드 조항을 만드는 문제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며 "우리는 곡물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날 EU 집행위원회는 우크라이나산 가금류, 설탕, 계란 등 일부 품목의 수입량이 2022년과 2023년의 평균치를 초과하면 자동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여기에 곡물은 포함되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특별정상회의 참석 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산 수입품에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EU의 우크라이나산 면세 조치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것이지, 우리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억만장자에게 혜택을 주는 불공정 경쟁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농가 소득 보장을 위해 '에갈림(Egalim)법' 적용을 강화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에갈림법은 식품제조업체, 유통체인 간 치열한 가격 전쟁에서 생산자인 농민의 피해를 방지하는 법이다.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은 "제조업체와 슈퍼마켓 체인 모두를 점검할 예정"이라며 "위반 시 매출액의 2%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만간 1만건 이상의 원산지 점검을 벌여 원산지를 속인 제조업체나 유통업체에는 매출액의 최대 10% 과징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축산농가 지원을 위한 1억5천만 유로(약 2천167억원)의 재정 지원책도 발표됐다.
정부는 아울러 농민들의 요구 중 하나인 직업적 존중을 위해 "식량 주권의 목표를 법에 명확히 명시하겠다"며 "농업을 근본적인 국익으로 농촌법에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아탈 총리는 지난달 26일 농업용 경유 면세 유지, 행정 절차 간소화 등 1차 농가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우리의 122가지 요구 사항 중 해결된 건 일부에 불과하다"며 트랙터 시위를 계속해 수도인 파리 봉쇄를 압박해 왔다.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 벨기에, 폴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농민 항의가 들끓자 EU는 전날 우크라이나산·몰도바산 저가 농축산물의 수입량이 급증할 경우 '세이프가드'를 발동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EU 공동농업정책(CAP) 보조금 지원 조건 중 하나였던 경작지 4% 휴경 의무화도 올해에 한해 면제하겠다고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농가의 행정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도 밝혔다.
물론 EU의 이런 방침은 전체 27개국의 합의가 이뤄져야 적용된다.
EU와 프랑스 정부의 각종 대책 발표는 즉각 효과를 낳았다.
15일째 트랙터로 도로 봉쇄 시위를 벌여 온 프랑스 농민단체들은 이날 정부의 발표 뒤 봉쇄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르노 가이요 청년농민회장은 전국농민연맹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현재 발표된 모든 것을 고려해 우리의 행동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며 "봉쇄를 중단하고 새로운 형태의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아르노 루소 전국농민연맹 회장도 "우리는 가시적인 진전과 함께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들었다"며 정부의 발표를 일단 환영했다.
루소 회장은 다만 "우리의 투쟁은 끝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며 시위를 완전히 접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는 "누구도 오늘 밤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의 발표가 가짜인지를 지켜보고 만약 그런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 후폭풍은 엄청날 것"이라고 정부에 경고했다.
루소 회장은 농민 시위에 불만 대신 지지를 보내 준 시민들에게는 감사를 표했다.
그는 "전 국민으로부터 받은 지지에 크게 감동했다. 현장에서 많은 응원과 이해의 메시지를 받았다"며 "25년 가까이 이 일에 종사해 오면서 프랑스인들의 이런 지지를 체감하고 느낀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부 농민 단체는 농산물 원가 이하 구매 금지 등 추가 조치를 요구하며 봉쇄 작전을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이번 농민 시위 과정에선 일부 농민이 지방 청사에 가축 분뇨를 뿌리고 폐타이어를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으나 공권력과 큰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전날 파리 외곽에 있는 렁지스 국제도매시장의 한 창고에 무단 침입해 체포 농민 91명도 대부분 풀려났다.
렁지스 시장 측은 일간 르피가로에 "해당 농민들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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