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의원 "위안부·징용 추도비도 철거해야"…일본 시민단체·교민만 외로운 싸움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현장 갔단 이야기 안들려…'가해역사 회피=한일 우호' 성립 안해
(도쿄=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일본 군마현이 시민단체 반대에도 지난달 다카사키시 현립 공원 '군마의 숲'에 있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를 끝내 산산조각 내 철거했다.
일본 극우 정치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국 내 다른 조선인 추도비 철거를 거론하며 공세를 폈다.
일본에서 과거 가해 역사를 부정하려는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이 강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양국 간 충돌하는 역사 문제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지 일본도 주시하고 있다.
군마현은 지난달 29일 시민단체를 대신해 추도비를 철거하는 행정 대집행 공사에 착수해 이틀 뒤인 31일 철거를 마쳤다.
이 추도비는 일본 시민단체가 한반도와 일본 간 역사를 이해하고 양측 우호를 증진하기 위해 2004년 설치했다.
비석 앞면에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가 한국어·일본어·영어로 적혔고, 뒷면에는 "조선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의 사실을 깊이 반성,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군마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6천여 명이 동원돼 노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마현 당국은 2012년 추도비 앞에서 열린 추도제에서 참가자가 '강제 연행'을 언급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설치 허가 갱신을 거부했고,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자체 처분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 지사는 조선인 추도비를 산산조각 내 철거해 놓고도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비 자체나 비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과거의 역사를 수정할 의도는 없다"는 주장했다.
그는 "(철거가 한국과) 외교 문제로도 발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현지 주요 언론과 지식인조차 군마현의 추도비 철거가 역사 왜곡을 조장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30일 사설에서 "사법(부 결정)이 철거까지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며 "전쟁 이전의 일본을 미화하는 풍조가 강해지는 가운데 일부 세력의 항의를 받은 군마현이 정치적 중립을 방패 삼아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려는 것이라면 역사 왜곡을 돕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헌법학 전공자인 후지이 마사키 군마대 교수도 "비가 철거되면 결과적으로 역사 수정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조선인 추도 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례가 다른 현에서도 있어서 철거가 나쁜 전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군마현 추도비 철거가 나쁜 전례가 돼 확산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은 현실화하는 조짐을 보인다.
과거 한복 차림 여성 등을 비꼬았던 극우 성향의 자민당의 스기타 미오 의원은 추도비 철거 뒤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정말 잘됐다. 일본 내에 있는 위안부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의 비 또는 동상도 이 뒤를 따랐으면 좋겠다"며 "거짓 기념물은 일본에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도 지난 5일 사설에서 "비를 소유한 시민단체는 규칙을 어기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며 "공원의 중립성을 위협하는 약속 위반의 정치활동으로 현이 비를 철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공세에 가담했다.
군마현의 추도비 철거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보여준 대응은 아쉽기만 하다.
특히 야마모토 지사가 "(한국과) 외교 문제로도 발전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일본에서 이번에 한국 정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추도비 철거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거나 철거 반대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군마현의 추도비 철거 관련 움직임에 대해 "한일 간에도 계속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다"며 "이번 사안이 양국 간 우호 관계를 저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길 기대한다"고만 말했다.
주일 한국대사나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철거를 앞두고 현장을 찾았다는 얘기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조선인 추도비를 소유한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 등 일본 시민단체와 주민, 재일교포 등이 군마현과 도쿄 등지에서 마지막까지 철거 부당성을 호소하며 항의 집회를 개최했다.
한국 정부는 추도비를 적절한 부지로 이전하는 것도 향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것이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고 충돌을 회피한 배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최근 개선되는 한일 관계를 고려해 이번 사건을 굳이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가해 역사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다고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 및 언론과 지식인들이 명백하게 문제점을 지적한 추도비 철거에 대해 한국 정부도 에둘러 한일 우호만을 말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대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sungjin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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