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조종사 피살에 러 정보기관 배후 가능성 주목
英언론 "우크라전 직전 한계 노출 러 정보기관, 역량 회복 조짐"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 유럽에서 러시아 스파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1일(현지시간) 스페인에서 발생한 전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 피살 사건의 배후가 러시아 정부일 가능성을 다루면서 "러시아가 유럽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당국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도 쿠즈미노프 피살을 언급하며 러시아 스파이들이 다시 유럽에서 활개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정보기관이 무자비를 대담하게 드러내면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되살아난 힘을 보여주는 신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쿠즈미노프는 지난 13일 스페인 동남부 베니도름 인근 한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최소 여섯 군데에 총을 맞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쿠즈미노프의 차량을 몰아 현장에서 달아났으며 이 차량은 인근 마을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됐다.
쿠즈미노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지난해 8월 Mi-8 헬기를 몰고 우크라이나로 망명했고 러시아 당국은 그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러시아 스파이에 관한 전문가 안드레이 솔다토프는 이번 갱단식 총격에 대해 러시아가 전 세계를 활보하며 살인을 저지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그는 "러시아 정보기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새로운 목적의식으로 뭉쳤다"며 "그들은 복수심을 갖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옛 소련의 첩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집권 아래 과거 러시아 스파이들은 자국에 등을 돌린 '배신자'들을 상대로 정교한 암살 작전을 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 러시아의 대외정보국(SVR), 연방보안국(FSB), 총정찰국(GRU) 등 정보기관들은 분열상을 보이며 국제적 웃음거리가 될 위기에 처했었다고 더타임스는 설명했다.
2018년 영국 솔즈베리의 독극물 사건에 관여한 러시아 요원들의 정체가 탄로 나고,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당초 러시아의 정보기관의 보고와는 달리 달리 우크라이나 국민이 완강히 저항한 것 등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실패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난주 쿠즈미노프 피살은 러시아 정보당국은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게 더타임스의 진단이다.
지난주 영국 싱크탱크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도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 총정찰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과가 없는 사람들을 고용해 추적을 피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했다.
또 총정찰국은 정보 유출을 우려해 요원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크게 줄이는 등 규율 강화에도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WP는 지난 2년간 유럽에서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400여명이나 추방됐다며 정보망 약화를 경험한 러시아 정보기관이 범죄조직을 동원해 쿠즈미노프를 살해했을 개연성을 거론했다.
우크라이나의 한 고위 정보 당국자는 WP에 "그들은 실수했지만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스파이들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유럽 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RUSI는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올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선거에 개입할 준비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noj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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