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대신 총' 가자전쟁에 초정통파 유대교 변화 바람

입력 2024-03-05 13:29  

'경전 대신 총' 가자전쟁에 초정통파 유대교 변화 바람
병역 면제에도 징집 지지자 늘어…이스라엘 주류사회와 연대감 커져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가자지구 전쟁을 계기로 세속사회와의 동화를 꺼려온 이스라엘의 초정통파 유대교도 '하레디' 사이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하레디'로 불리는 초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유대교 경전 '토라'를 공부하고 그에 적힌 방식에 따라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는 극보수·근본주의 성향의 신자 집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세속적 가치를 거부한 채 일반 사회와 분리돼 극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한다.
특히 남성들은 다수가 따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토라 읽기와 율법 연구에 전념한다.
이스라엘은 18세 이상 남녀 모두 군 복무가 의무지만 초정통파 신자는 전통 유대교 학교인 '예시바'에 다니는 경우 병역이 면제다.
홀로코스트로 말살될뻔한 유대 문화와 학문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건국 초기부터 주어진 특혜다.
1948년 약 4만명이던 하레디가 현재 100만명 이상으로 급증하며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자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의 징집을 추진해왔다.
2017년에는 이스라엘 대법원이 하레디의 군 면제를 위헌으로 판결했으나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의 거센 반발로 정부는 관련 규정을 수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NYT는 그러나 이전에까지 징집에 반발해온 하레디 중 상당수가 가자전쟁 이후 병역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등 세속적 주류 이스라엘 사회와의 연대가 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연구 단체 '하레디 공공문제 연구소'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레디 대중의 약 30%가 징집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쟁 이전보다 20%포인트나 높아진 수치다.
또한 조사 대상 하레디의 약 75%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 이후 다른 이스라엘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의식이 더 강해졌다고 답했다.
전쟁 초기인 지난해 11월 군 복무 경험 없는 하레디 남성 약 2천명이 자원입대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이는 전체 병력에서는 소수지만 이전까지 하레디의 연간 자원입대자 수의 두배에 해당한다.

이미 군대에 있거나 다녀온 소수의 하레디는 지역사회와의 유대가 강해졌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하레디 강사이자 랍비인 네차미아 슈타인베르거(40)는 3년 전 군 복무를 마쳤으나 지난해 10월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 이후 예비역으로 다시 군에 들어가 공군 지원 사령부 운영을 도왔다.
지난해 12월 말 돌아온 슈타인베르거는 군복을 입고 예루살렘 인근 하레디 거주 지역을 걷던 중 하레디 어린아이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들었다.
또 그가 하마스와 싸우러 가 있던 동안 집 근처 초정통 유대교 회당에서는 신자들이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토라를 바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슈타인베르거는 이 모두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며 "이건 무언가 새로운 일이었다. 내가 마치 영웅이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레디 여성들도 변화에 한몫했다.
가정 문제로 집을 나온 하레디 소녀를 돕는 일을 해온 차나 이롬(44)은 가자 전쟁 발발 이후 하레디 여성 1천명으로 이뤄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하마스 공격으로 집을 떠나온 주민들을 자기 집으로 대피시키고 예비군 가족을 위해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 장보기 등을 도왔다.
하레디 특권 폐지 운동을 벌여온 정치인 아비그도르 리베르만은 "하레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변화가 보인다"고 말했다.
세속적 민족주의 정당인 이스라엘 베이티누당 소속으로 부총리, 재무장관 등을 지낸 리베르만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참여하지 않으면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한다"고 부연했다.
이러한 변화가 하레디 집단의 주류는 아니다.
독실한 유대교식 생활방식을 현대 이스라엘 가치관에 맞춰 가려 노력하는 소위 '현대화된 하레디'들은 전체 초정통파 유대인의 약 10%로 추산된다.
대다수 하레디는 여전히 "총보다는 기도"가 필요하다며 세속 사회의 일에 관여하기보다는 경전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일부 하레디 지도자들은 상황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데 동의한다고 NYT는 전했다.
하레디인 이츠하크 골드노프 이스라엘 건설주택부 장관은 지난해 10월7일 긴급 내각 회의가 소집됐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안식일 규칙을 어겼다.
하레디 사회에서는 여성이 등장하는 광고도 금기시되지만 지금 그의 집무실 안에는 여성이 다수인 이스라엘 인질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골드노프 장관은 일부 하레디는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며 "(하마스의 공격은) 나를 많이 변화시켰다. (토라를) 공부하지 않을 사람은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inishmor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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