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겨냥 "탄압 몰두하면 자기 손해…손잡으면 세계에 좋아"
한반도 문제에는 "전쟁 재발 안 돼…평화 협상 재개해야"
"대만선거, 중국 일부란 사실 바꾸지 않아…'이팔 전쟁'은 문명 치욕"
(베이징·서울=연합뉴스) 정성조 특파원 이봉석 기자 =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외교장관)이 7일 미국의 잘못된 대(對)중국 인식과 제재가 계속되고 있다며 미국을 비난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며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안 된다면서 냉전 구도로 평화를 깨려는 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왕 주임은 이날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외교부장 자격으로 연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기자회견에서 "(작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래 중미 관계 개선에는 확실히 일부 진전이 있었으나 미국의 잘못된 대중국 인식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미국이 한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을 탄압하는 수단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일방적 제재 리스트는 부단히 길어지고 있다"며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 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왕 주임은 "미국이 늘 말과 행동을 달리한다면 대국의 신용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만 번영을 유지하고 타국의 정당한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국제적 도리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이 가치사슬의 상단을 독점하기를 고집하고 중국은 아래에만 머물게 한다면 공평한 경쟁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강하게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직면한 도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 중국 탄압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스스로를 해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왕 주임은 올해가 미·중 수교 45주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미국과 대화·소통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을 제거하기를 바란다"며 "중국과 미국이 손을 잡으면 양국에 좋고 세계에 좋은 큰일을 많이 해낼 수 있다"며 '유화적인 제스처'도 빼놓지 않았다.
왕 주임은 미국과 함께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는 유럽연합(EU)에 대해서는 "사실 중국과 유럽은 근본 이익의 충돌이 전혀 없고 지정학적인 전략 모순도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재 정세가 갈수록 긴박해지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生戰生亂) 안된다"고 강조했다.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평화 협상을 재개해 각 당사자, 특히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결하고,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라는 표현은 최근 한반도 긴장 고조의 원인이 북한이 아닌 한국과 미국에 있다는 인식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한반도 문제의 근원이 "냉전의 잔재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뒤 쌍궤병진(雙軌竝進·비핵화와 북미평화협정 동시 추진)과 단계적·동시적 원칙이라는 기존 한반도 정책을 재확인했다.
그는 "누구든 한반도 문제를 이용해 냉전과 대결로 몰려 한다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지역의 평화·안정을 깨려는 자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주변국 외교 전망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아세안의 중심적 위치를 지원하고, 한중일 협력의 심화·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견에서는 대만 문제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 우크라이나 전쟁 등 이슈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도 재차 언급됐다.
왕 주임은 친미·반중 성향의 민진당 라이칭더의 승리로 끝난 지난 1월 대만 총통 선거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지방 선거일 뿐"이라면서 "선거 결과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기본적 사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고, 대만이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역사의 대세도 바꿀 수 없다"고 역설했다.
대만 선거 후 180개 이상의 국가와 국제기구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다는 점도 내세웠다.
이어 "대만 독립이라는 분열 행위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라면서 "대만의 평화를 진정으로 지키려면 대만 독립에 대한 분명한 반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만이 조국으로부터 분리돼 나가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국제적으로 누구든 '대만 독립'을 종용·지지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불을 붙여 태우는 꼴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해 묻자 그는 "인류의 비극이자 문명의 치욕"이라며 팔레스타인 인민이 민족의 합법적 권리를 되찾는 것과 팔레스타인이 유엔(UN) 정식 회원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외신들이 최근 중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자로 나설 가능성을 거론한 가운데 왕 주임은 "어떤 충돌도 종착점은 협상 테이블"이라면서 "평화 협상이 열릴 수 없다면 오해와 오판이 누적되고, 더 큰 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서 중국 관영중앙(CC)TV에 이어 두 번째 질문자로 나선 러시아 기자의 중·러 관계 관련 질문에 그는 올해가 수교 75주년이라면서 새로운 발전 기회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왕 주임은 오는 14일부터 시행되는 스위스와 아일랜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대한 비자 면제도 발표했다.
앞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 대해 비자 면제 정책 시범운영에 들어간 중국은 경제 부진 속에 대상을 확대해가며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노리고 있다.
왕 주임은 2013년부터 2022년 말까지 외교부장을 지낸 뒤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후임 외교부장인 친강 전 부장이 임명 7개월 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면직된 뒤로 현재까지 외교부장직까지 겸임하고 있다.
외교사령탑인 왕 주임이 체계상 하급자인 외교부장직까지 겸직하게 된 상황을 두고 다음 외교부장감을 찾을 때까지의 '임시방편'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당국이 연례 최대 정치행사인 이번 양회를 계기로 후임 외교부장을 인선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유력한 외교부장 후보는 류젠차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다.
11일까지 이어질 올해 양회에서 차기 중국 외교부장이 결정된다면 왕 주임이 외교부장으로서 여는 내·외신 기자회견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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