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 100일 르포] "국민에게만 고통" vs "희망갖고 기다릴뿐"

입력 2024-03-18 10:29  

[밀레이 100일 르포] "국민에게만 고통" vs "희망갖고 기다릴뿐"
밀레이 "100년 전 번영 되찾으려면 강력한 개혁 필요…고통 불가피"
몰아치기식 일방개혁에 성과는 보이지 않고, 국민의 어려움은 가중
파업 등 사회적 갈등·불만 고조에도 밀레이 국민 지지 43~53% 유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밀레이는) 개혁의 고통은 카스타(기득권)가 감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중산층 이하 국민이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45세 공무원)
"밀레이를 지지하지 않지만, 버티고 기다려서 좋은 날이 오리라고 희망을 갖는 것 외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40세 주민)
"굶는 아이들이 있는데 무슨 문화예산이냐. (밀레이 정부가) 영화 관련 기관인 INCAA 예산을 삭감한 것은 잘한 일이다"(또다른 40세 주민)

100년간의 쇠퇴에서 벗어나 지난 19세기 말 번영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취임한 지 오는 18일(현지시간)로 100일을 맞는다.
극우 자유경제 신봉자인 밀레이 대통령은 그동안 오직 급진적인 개혁만이 아르헨티나의 각종 병폐와 부정부패한 카스타(기성 정치인, 기득권)를 척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100년 전 번영을 되찾기 위해선 강도 높은 긴축정책이 동반된 개혁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불경기)과 같은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만성적인 경제위기 속에 새 정부 출범을 맞았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동안 쉴틈없이 몰아친 새 정부의 각종 개혁조치에 나름 기대를 나타내며 인내했으나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개혁의 성과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혹시나 했던 기대와 달리 밀레이 정부의 일방 통행식 개혁과 협치의 부재 속에 대립과 갈등이 심화하면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며 안타까움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만 여전히 40~50%에 이르는 밀레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를 감안하면 새 정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국민 역시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둔화로 돌아선 물가상승률…아직 체감되지 않는 성과에 불만 고조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 2월 월간 물가상승률이 13.2%로 1월의 20.5%보다 큰 폭으로 둔화했다면서 자축했다.
그러나 2월 연간 물가상승률은 276%로 석 달 연속 세계 최고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밀레이 대통령 취임 전인 작년 11월 월간 물가상승률은 12.8%, 연간 물가상승률은 160%이었다.
밀레이 집권 이후 누적 물가상승율은 3달간 71%를 기록하면서 고공행진 하고 있는 것이다.
전 정권의 인위적인 물가 억제 정책을 폐지하고 상대가격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정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이 결정하는 시장가격이 '공정한 가격'이라고 믿는 밀레이 대통령도 예상보다 식료품 가격이 잡히지 않자 식료품 수입 개방을 발표했다.
루이스 카푸토 경제장관은 물가 하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면서 대형마트의 1+1 할인행사 대신 낱개 가격을 표시해달라고 협조를 구하는 일도 발생했다.
정부의 조치는 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는 '격화소양'(일을 하느라고 애는 무척 쓰되 정곡을 찌르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비유한 말)과도 같아 보인다.
현지 언론은 최근 아르헨티나 현지 기본 식료품 가격이 미국이나 스페인보다도 더 높다고 분석했다.
최저 임금은 이들 나라의 10∼20% 정도 수준인데 기본 식료품은 같거나 더 비싸기 때문에 국민들이 '밀레이식 개혁'에 얼마나 더 참고 버틸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좋아질 것 같지 않다"·"1주일 내내 옷 한 벌도 팔지 못했다"

밀레이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중상층 지역의 대형마트에서 만난 교사인 비앙카(30)는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다.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 중인데, 학생의 30% 정도가 학비를 내지 못해 공립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상점 직원이라는 훌리안(26)은 "나빠지면 더 나빠지지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며 "아르헨티나 중상류층이 사는 지역인데도 대형마트에 사람이 이렇게 없는데 다른 지역은 어떻겠냐?"고 한탄했다.
자신을 45세 공무원이라고 밝힌 파쿤도는 "밀레이는 개혁의 고통은 카스타(기득권)가 감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은퇴자들을 비롯한 중산층 이하 국민이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재정 흑자를 이뤘다고 하지만, 단순히 지자체에 줄 돈을 안 주고 은퇴자를 비롯한 공무원들 월급 인상을 미루면서 이룬 재정 흑자는 지속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대형마트 직원인 파트리시아(52)는 "고객이 많이 줄었고 사람들은 1+1 등의 할인 행사 물건만 집어간다"면서 "수요일엔 은퇴자들에게 15%를 할인해 주는데, 그날이 사람이 가장 많다"고 귀띔해줬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넓고 넓은 대형마트 계산대에는 단 2명의 직원만 근무하고 있었다.



같은 동네 야채가게도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에는 줄을 서서 사야 하는 가장 잘 되는 야채가게였는데, 이날은 젊은 부부 둘만 가게에서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온 것도 있지만, 야채 가격이 갑자기 많이 올라서 판매가 많이 줄었다"면서 "전에는 1킬로씩 사가던 것도 이제는 필요한 양만 매일 조금씩 사 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50대 한인 교포는 "사람들이 돈이 없어 식료품이나 약도 못 사는 상황인데 옷을 살 돈이 있겠냐?"면서 "이번 주 내내 폭우로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가을-겨울 새시즌 옷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옷 1장도 못 팔고 집에 들어가는 한인 교민도 있었다"고 얘기해줬다.
한인 교민 대부분이 의류산업에 종사하는데, 급격한 소비 하락으로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중소기업단체(CAME)에 의하면 지난 1월 소비하락은 -28.5%를 기록했으며 약품(-45.8%)과 식료품(-37.5%)도 피해서 가진 못 한 셈이다. 아르헨티나의류연맹(CIAI)에 따르면 지난 1월 의류 매출 하락은 -30% 이상을 기록했다.



◇밀레이 지지도 43~53%…"옳은 길로 가고 있다" vs "기다려볼 수밖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저 43%에서 53%를 보이고 있다.
지난 11월 결선에서 55.6% 득표한 밀레이는 12월 취임 직전 63%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취임 2주 후 물가 폭등과 메가 대통령령 발표로 지지율이 44%까지 급락했으나, 각종 파업 등 사회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평균 50% 정도의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길가에서 만난 다미안(40)은 밀레이 취임 100일에 대한 소감을 묻는 연합뉴스에 "밀레이 정부는 옳은 길로 가고 있다"면서 "고물가를 사회가 얼마만큼 더 견딜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격 자유화는 당연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의료보험이 너무 올라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 대해선 "민간 의료보험료를 못 내면 국립 무료 병원에 가면 된다. 이는 선택의 영역이다"라면서 밀레이 정권을 강하게 지지했다.
영화 관련 기관인 INCAA 예산 삭감과 고몽극장 폐쇄에 대해선 "굶는 아이들이 있는데 무슨 문화예산이냐"며 밀레이 대통령의 일명 '문화혁명'를 지지했다.
반면, 30대 다니엘라는 "과점시장인 민간의료보험은 가격이 비싸다고 다른 걸 선택할 수가 없다. 지병이 있으면 가입이 거절되고, 큰 수술을 한 사람들은 집도의가 봐주기를 바라지, 더 싸다고 다른 의사한테 갈 수 없는 볼모가 된다"면서 "정부가 할 일은 이러한 경우 규제를 하는 것이다"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했다.
그외 "취임한 지 3개월밖에 안 되었으니 지난 수십년간의 실패를 단기간에 해결하리라는 큰 기대를 할 수도 없고, 밀레이를 지지하지 않지만, 버티고 기다려서 좋은 날이 오리라고 희망을 갖는 것 외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라는 체념 섞인 마리(40)의 말이 거리에서 만난 많은 시민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밀레이 대통령은 최근 "3월과 4월 일부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어두운 터널 끝에 밝은 빛이 비칠 것"이라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아파트 관리비, 사립학교 학비, 민간 의료 보험비, 대중교통비, 가스·전기·수도세 등 각종 인상이 줄줄이 예고된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한숨은 깊어만 가고 있다.
sunniek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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