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서 '리니에 아인스' 39년째 공연하는 폴커 루트비히
"'쌍둥이 극단' 학전 폐관, 비극이자 동시에 전설의 시작"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김민기와 처음 만난 29년 전부터 진심 어린 우정을 쌓아왔어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사람입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86)는 1969년 설립 이후 50년 넘게 이끌고 있는 그립스 극단과 최근 문 닫은 학전을 "쌍둥이 극단"이라고 불렀다. 김민기 학전 대표와 인연 덕분에 "서울은 나의 작은 고향이 됐다"고도 했다.
지난 2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그립스 극단에서 만난 루트비히는 "김민기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정말 자랑스럽다"며 "그의 투병 소식은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루트비히가 열네 살 많지만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다. 김민기는 스무 살이던 1971년 발표한 '아침이슬'로 반독재 문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루트비히가 1969년 설립한 그립스 극단은 당시 서독 당국에 '좌파 소굴'로 낙인찍혔다.
루트비히는 '빠른 이해', '깨어 있는 지성'을 뜻하는 독일어 그립스(Grips)를 극단 이름으로 지었다. 학전은 '배울 학'(學)에 '밭 전'(田)을 쓴다. 두 극단 모두 어린이·청소년극에 애정을 갖고 '배움터' 역할을 해왔다.
김민기가 독일문화원인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루트비히의 '지하철 1호선'을 영상으로 처음 접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했다.
"김민기는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지하철 1호선'에 매료됐습니다. 분단된 베를린과 한국 사람들 사이 동질감으로 원작과 매우 흡사한 캐릭터를 만들어냈어요. 전 세계 대도시에서 가난한 이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슷한지 다시 한번 보여줬죠."
두 사람은 학전의 '지하철 1호선' 초연 이듬해인 1995년 처음으로 만났다. 김민기는 원작을 대폭 각색해 루트비히가 언짢을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루트비히는 "정반대였다. 김민기의 버전에 감동받았다"며 "내 작품의 영혼이 살아있었고 유머는 깊이 있었다. 젊은 배우와 뮤지션들은 정말 뛰어났다"고 했다.
루트비히는 학전의 '지하철 1호선' 공연이 1천회를 넘길 때부터 저작권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원작을 뛰어넘는 독창성도 있었지만 학전의 만성적 재정난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4천회를 넘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반대죠. 학전은 마지막 날까지 다른 다섯 편의 저작권료를 줬습니다." 학전은 '지하철 1호선'뿐 아니라 '고추장 떡볶이', '우리는 친구다', '슈퍼맨처럼!' 등 그립스 극단 작품을 여러 편 각색해 공연했다.
루트비히는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는 동판 하나를 가져왔다. 학전은 2019년 그립스 극단 창립 50주년 페스티벌 때 베를린을 방문해 이 동판을 선물했다. 서울판 '지하철 1호선'이 당시 페스티벌 폐막작이었다.
루트비히와 2012년 별세한 원작 작곡가 비르거 하이만의 얼굴 사이에 '두 분 예술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라는 문구를 한국어와 독일어로 새겼다. 이 동판은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입구에도 김광석 노래비와 함께 걸려 있다.
루트비히는 "학전은 그립스 극단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배우와 스타를 배출했다"며 "세계가 환호하는 재즈 보컬 나윤선을 보라"고 말했다. 나윤선은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의 여주인공 선녀 역으로 데뷔했다.
그는 "사랑하는 쌍둥이 극단 학전의 폐관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위대한 전설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훌륭하고 세계적인 극단이 지원받지 못하고 내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려왔다는 점은 독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문화·정치적 수치"라고 했다.
1986년 초연한 그립스 극단의 '지하철 1호선'(독일어명 '리니에 아인스')은 지난해 12월 2천회 기록을 세우며 39년째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동안 서울과 홍콩·리우데자네이루·바르셀로나·이스탄불 등 28개 도시에서 현지 대중교통 실정에 맞춰 각색됐다.
루트비히는 세계 관객을 사로잡는 작품의 매력으로 "시대 비판적 리얼리즘과 풍성한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을 꼽았다.
"전형적 베를린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지하철은 이상적인 매개체였죠. 관객은 무대 위 인물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게 공동의 경험을 끌어내기도 하고요."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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