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과거사 반성 빠진 기시다 美의회 연설…역사 문제는 해결됐나

입력 2024-04-20 07:07  

[특파원 시선] 과거사 반성 빠진 기시다 美의회 연설…역사 문제는 해결됐나
日정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실 확인 회피…교과서에는 '종군위안부' 용어 삭제
각료·국회의원, 21∼23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예상돼



(도쿄=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미국을 국빈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과거사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이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다.
기시다 총리보다 더 우파 성향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9년 전 같은 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표명했지만, 기시다 총리는 이 문제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베 전 총리는 당시 연설에서 "우리(일본)는 전쟁(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며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역대 총리들에 의해 표현된 관점들을 계승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이번 연설에서 '글로벌 파트너'로서 미일 관계 미래상에 방점을 맞췄을 뿐, 전쟁이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일 관계는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개선 추세다.
이는 윤 정부가 지난해 3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한 제3자 변제 해법 발표 등 적극적인 대일 관계 개선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지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 입장이 개선됐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3자 변제 해법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민간의 자발적 기여로 마련한 재원을 통해 소송에서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 대신 배상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컵에 물을 절반 채우면 일본 정부도 과거사 문제에서 나머지 반을 채우면서 호응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일본 정부는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가해 역사를 반성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일본 정부와 정치인의 말이 정말 사실인가라고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최근 들어서도 하루가 멀다고 생기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지난 9일 참의원(상원)에서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 군중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당시 판결과 관련해 "재판소 인정이 옳은지 평가할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사실인정을 또다시 회피했다.
재판소에서 20세 조선인 남성을 살해한 일본인 피고 4명에게 징역 1년 6월 등의 선고가 내려진 판결문을 찾아내 이를 확인한 야당 의원 질의에도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부 학계와 시민사회로부터 간토대지진 당시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학살됐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지만, 일관되게 이를 외면해 왔다.
일본 육상자위대 부대는 지난 5일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용어인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버젓이 썼다가 비판이 일자 사흘 만인 8일 삭제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식민 지배한 아시아 권역 등을 하나로 묶은 이른바 '대일본제국'이 서구 열강에 맞서 싸웠다는 인식을 담고 있어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의도를 담은 용어로 분류된다.
이 부대는 격전지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일본 정부조차 공문서에 이 용어를 쓰지 않아 사실상 '금기어'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일 관계 미래를 책임질 일본 청소년 교육에 사용되는 교과서도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달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야마카와출판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4년 전 검정 교과서에 기술했던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삭제됐다.
이는 일본 정부가 2021년 4월 각의(국무회의)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오해를 부를 우려가 있다"며 "단순히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채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앞서 지난 1∼2월에는 군마현 당국이 "조선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의 사실을 깊이 반성,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이라는 글이 새겨진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를 철거했다.
주일 한국대사관은 철거 전 조선인 추도비 문제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군마현 지사와 대사관 간부 간 면담을 요구했으나, 군마현은 이마저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각료와 100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은 이달 21∼23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의 춘계 예대제(例大祭·큰 제사)를 맞아 단체 참배할 것으로 예상된다.
되풀이되는 도발을 보면서 일본은 진정으로 역사를 반성하고 한국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됐는지 의문이 든다.
다만 한일 관계는 이런 과거사 문제에도 북한 위협에 대한 한미일 공동 대응과 한일 정상 간 신뢰, 양국 국민 간 교류 확대 등으로 개선 추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7일 윤 대통령과 전화 통화 뒤 기자들과 만나 "방미 결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생각에서 전화를 걸었다"며 "한일 및 한미일 간 협력을 한층 더 심화하고 양국이 정상 간을 비롯해 여러 기회를 통해 긴밀히 의사소통을 도모해가기로 했다"고 통화 내용을 직접 설명했다.

sungjinpar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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