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노효동 논설위원 = 1945년 미 군정이 시작된 이후 주한미군 철수론을 가장 먼저 들고나온 이는 로버트 패터슨 육군성 장관이었다. 1947년 4월 딘 애치슨 국무장관 대리에게 보낸 전문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에서 조기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팽창을 막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온 지 불과 한 달 만이었다. 육군 자원이 과도하게 고갈된다는 이유였는데, 당시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국방예산 삭감에 나선 것이 큰 영향을 줬다. 국무부의 반대에도 결국 주한미군 철수는 1948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거쳐 공식화됐고, 이듬해 6월까지 고문단을 제외한 모든 미군이 철수했다. 전략적 오판은 결국 1년 후 북한의 침공을 불렀다.
1968년 집권한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줄이는 닉슨 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베트남 철군과 함께 주한미군 7사단과 2사단의 철수를 추진했다. 이에 반발한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을 만나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했고, 그 결과 7사단만 철수하고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는 내용의 공동선언이 도출됐다. 주한미군 철수를 아예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카터 행정부는 1976년 집권하자마자 인권 문제를 내세워 지상군을 중심으로 한 3단계 철수안을 공식화했다. 박 대통령과 미군 수뇌부의 거센 반대에도 카터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다가 존 싱글러브 유엔사 참모장이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이어 북한군 전력이 과소 평가됐다는 '암스트롱 보고서'까지 언론에 유출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결정적으로 우군이었던 민주당이 반대 의견을 내면서 카터의 계획은 좌초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최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부유한 나라를 방어하느냐"고 언급하며 주한미군 철수론이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트럼프 재집권 시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된 문제가 아닌 북한을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한반도에 미군을 인질로 붙잡아둬서는 안 된다"고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러나 정작 트럼프 1기를 경험한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트럼프가 또다시 엄포를 늘어놓는 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역대 미국 행정부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대두된 배경에서 보듯이 주한미군 주둔은 결코 고정불변의 상수는 아니다. 미국의 안보전략 목표의 변화, 지도자의 성향과 의회와의 역학관계, 그리고 재정 상태 등 미국 내부의 논리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미군 철수는 현실화할 수 있는 카드다. 집권 1기 당시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 명령을 내리겠다고 수차례 언급해 참모들이 극구 만류한 일이 있었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철수는 두 번째 임기 우선순위로 하시죠"라고 제안하자 트럼프가 맞장구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대중국 견제라는 큰 틀의 안보전략 목표가 바뀌지 않는 한 미국이 스스로 주한미군을 철수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 트럼프 진영의 정책 싱크탱크인 미국우선정책연구소(AFPI)는 지난 9일(현지시간) 펴낸 보고서에서 "주한미군은 (미국과 중국의) 전면 충돌이 발생하면 중국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트럼프 측의 주한미군 철수론은 방위비 분담금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협상 기술적 포석일 개연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 진영에서 흘러나오는 수사를 들여다보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독자 핵무장 시나리오까지 거론하고 있는 점이 심상치 않다.
주한미군 철수와 독자 핵무장 문제는 한미동맹과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동북아 전체의 전략적 균형을 뒤흔드는 '게임 체인저'나 다름없다. 동맹의 의사를 무시한 채 미국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현상 변경을 밀어붙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주목해야 할 곳이 미국 의회다. 과거 미국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회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트럼프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의회의 전체적 기류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둔, 한반도 비핵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국이 적정 수준의 방위비를 분담하고 있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트럼프 1기 때 주한미군을 감축할까 봐 국방수권법에 주한미군을 2만8천500명 아래로 축소하는데 예산을 쓸 수 없도록 안전 조항을 넣은 게 미 의회다. 이런 의회를 우군화하고 초당파적인 지지 흐름을 만들어 트럼프의 마이웨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우리 국회도 최근 워싱턴DC에 개소한 '한미의회교류센터' 등을 활용해 초당파적으로 외교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트럼프 2기 집권 가능성에 대비해 자연스럽게 핵 자강론 내지 독자 핵무장론이 대두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안보는 우리 스스로 지키는 자주국방 차원에서 당연히 논의할 필요가 있는 담론인 것은 맞다. 그러나 여론에 휩쓸린 감정적 접근보다는 냉엄한 국제 안보의 현실에 맞춰 극히 신중히 다뤄야 한다. 안보 도박은 결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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