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유권자단체 연례행사서 유세 같은 연설…'트럼프 때리기' 승부수?
(워싱턴=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수십 년 만에 초당적 지지를 받는 포괄적 이민개혁 법안을 내가 마련했는데, 그 자, 그 루저(loser·패배자)가…."
14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워싱턴 D.C.의 월터 E.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계의회연구소(APAICS) 연례 갈라 행사장.
연사로 나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자 현장의 1천300여명 청중은 문장을 다 듣기도 전에 약 10초 동안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리턴매치를 벌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하원 공화당 의원들에게 국경통제 강화 등을 담은 '바이든표 이민개혁안(案)'에 동의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바람에 야심 차게 마련한 법안이 좌초됐다는 취지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청중들 앞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집요하게 조롱하고 공격했다.
그는 "나는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선거운동에 한참 나서야 할 때뉴욕에서 '성추문 입막음 돈 지급 의혹'과 관련한 형사재판을 받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상황을 은근히 조롱했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감세 기조와, 건강보험개혁법(ACA·Affordable Care Act·일명 오바마케어) 폐기 공약 등을 비판하면서 "내가 지켜보는 동안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해 박수를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다양성이 우리의 힘"이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연말 선거유세에서 이민자들에 의한 '혈통 오염'을 주장한 사실을 재차 거론했다.
또 "내 전임자는 우리가 복수와 응징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과 기회의 나라이자, 정직과 품위, 신뢰, 공정의 나라라고 믿는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과 자신을 대비시켰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경제 정책 관련 성과를 일부 언급하긴 했지만 주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공세에 집중했다.
올 초 대선 경선 레이스 시작 이후로도 한동안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내 전임자'와 같은 완곡한 호칭을 썼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루저'와 같은 멸칭도 거침없이 사용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패한 조', '슬리피(졸린) 조' 등과 같은 경멸조의 호칭을 사용하는 동안 '맞대응'을 자제했으나 대선을 5개월여 남긴 지금, 점점 '적수'를 닮아가는 모양새였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각종 대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 박빙 또는 근소한 열세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민주당을 결집하고, 중도층의 '반(反)트럼프 표심'을 얻을 수 있는 '트럼프 때리기'를 최대 승부수로 삼고 있는 듯했다.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의 정치 참여를 촉진하는 단체인 APAICS가 주최한 이 행사는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 '집토끼 잡기'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대선에서 아시아계의 70%가량이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기 때문이다.
미국 조사기관 퓨리서치에 따르면 미국 내 아시아계 유권자는 약 1천500만명으로, 11월 대선에서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약 2억4천600만 명)의 약 6.1%에 해당한다. 아시아계 유권자는 지난 2020년 대선에선 전체 유권자의 5.5%였으나 4년 사이에 가장 큰 폭으로 비율이 늘어났다.
아시아계는 캘리포니아·뉴저지·뉴욕·텍사스주와 하와이 등에 많이 거주해 대선 승패를 좌우할 경합주의 캐스팅 보트를 쥔 유권자층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해 기본적으로 잡고 들어가야 할 '텃밭'인 셈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바이든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 온 것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연설에 적극 호응했다.
아시아계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인 앤디 김(뉴저지), 주디 추(캘리포니아), 그레이스 멍(뉴욕) 등도 자리했다.
한편 행사장 근처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스라엘 지원을 비판하는 친(親)팔레스타인 시위대 수십명이 '바이든의 유산은 집단학살'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든 채 시위를 벌였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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