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승한 기자 = 정부가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전면 폐지한 것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우주, 양자 등 혁신기술 개발에 예산을 빠르게 투입해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예타로 인해 지연되던 기술 개발이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예타가 사업을 정밀하게 조율하고 낭비 요소를 걷어내던 순기능도 있는 만큼 이런 기능을 살린 정밀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까지 국가 R&D 사업은 500억원 이상의 경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예타를 통해 과학기술적·정책적 필요성, 경제성 등을 따져 왔다.
하지만 심사에 최소 수 개월 이상 걸리고 예타에서 탈락하면 다시 예타 심사 과정을 거쳐야 해 빠른 기술 개발이 필요한 R&D 분야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정부 입장에서도 주요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고 싶어도 예타를 통과하지 못하며 동력을 잃는 경우가 있어 왔다.
양자 분야에 8년간 9천960억원을 투자하는 '양자 과학기술 플래그십 프로젝트 사업'은 2022년 예타를 신청하고도 결과를 받지 못해 과학기술계에서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다.
혁신도전 R&D 사업의 경우도 예타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예타를 피하기 위해 490억원으로 예산을 편성하는 등 '꼼수'로 예산을 일부만 투자하는 반쪽 투자도 이어져 왔다.
여기에 평가 과정에서 예산이 기존 부처가 제시한 예산보다 대폭 줄어드는 경우가 많아 기존 사업 기획 당시 세운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반쪽짜리 사업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올해 예타를 통과한 바이오파운드리 사업의 경우 윤석열 정부에서 합성생물학 육성을 강조하며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당초 8년간 7천434억원 규모로 추진됐던 것이 예타를 거쳐 인프라 구축만 남은 채 5년간 1천263억원 규모로 줄어들기도 했다.
다만 과학계에서는 R&D 예산이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운영되면 예타가 걷어내던 '낭비 요소'가 예산에 끼게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모 부처는 지난해 신규 가용예산이 3천407억원임에도 예타 착수 요구액이 1조2천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또 R&D 사업 기획이 외부의 평가를 받지 않고 깜깜이로 운영되면 정부가 자유롭게 예산을 짤 수 있는 만큼 특정 분야나 단체가 예산에 끼어드는 또다른 '카르텔'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때문에 예타를 면제해도 부처별 예산에 맞춰 R&D 규모를 맞추는 사전 조정이나 사업을 사후 검토해 부실이나 카르텔 요소를 걷어내는 사후 검토 등으로 예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학기술계 한 관계자는 "예타의 순기능도 있는 만큼 이를 무작정 풀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사전이나 사후 검토 등을 정밀 설계해 기존 예타의 역할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R&D 예타 폐지를 천명했지만, 예타 폐지는 법 개정이 필요해 국회를 설득하는 것도 과제가 될 전망이다.
shj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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