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부실 PF 정리 개시…외환위기·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번째
사업성 평가 기준 "현실성 없다" 업계 반발…부실 정리 규모 촉각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지방의 한 주택업체는 최근 금융기관으로부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원금을 회수하겠다는 사전 통보를 받았다.
본 PF 전에 받는 브릿지론을 4회 연장하고, 최초 대출 만기 도래 후 6개월 내 토지를 확보하지 못하는 등 금융당국이 정한 '부실우려' 사업장으로 분류됐다는 것이다.
업체 관계자는 "브릿지론 단기 계약과 연장은 고금리 시기에 흔히 이뤄졌고, 토지 매도청구 소송 등으로 토지 확보가 지연되고 있는 것인데, 부실 사업장이라며 대출금을 갚으라니 당혹스럽다"며 "개발사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반발했다.
금융당국의 부실 PF 재구조화가 본격화하면서 건설업계에 긴장감이 확산하고 있다.
이번 구조조정의 집중 타깃이 될 것으로 보이는 중견 건설사와 개발업체(시행사)를 중심으로 연쇄 부도가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건설업계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 이어 3차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것으로 본다.
◇ 건설·시행업계 "획일적 사업성 평가 기준 문제"…연대보증 단절 요구도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에서 금융감독원 주최로 열린 'PF 연착륙을 위한 건설업계 2차 간담회'는 당초 예정 시간을 훌쩍 넘어 2시간 동안 이어졌다.
비공개로 진행된 간담회에서 중소건설업계는 지난 13일 금융당국이 발표한 PF 사업성 평가 기준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간담회에 참석한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마디로 업계의 울분을 토해낸 자리였다"면서 "특히 존폐의 기로에 놓인 중소 건설사와 시행사 대표를 중심으로 정부의 부실 PF 정리 기준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고 전했다.
현재 건설업계는 당국이 정한 PF 만기 연장 횟수(3∼4회), 분양률(60% 미만), 공정률(계획 대비 25%포인트 하회) 등 획일화된 기준으로 부실 정리 대상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경우 건설 사업의 특수성을 고려치 않고 금융기관이 경직된 기준을 적용해 정상화 가능성이 큰 곳도 부실 사업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부동산개발협회 관계자는 "2022년부터 금리가 급등하면서 금융권은 이자를 높게 받기 위해, 시행사는 혹시 모를 인하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브릿지론의 만기를 3개월 단위로 짧게 가져간 경우가 많았는데 만기 연장 횟수 등 획일적인 잣대를 평가 지표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사업성이 양호한 곳도 부실 사업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매도청구소송이나 각종 영향평가 등으로 토지매입, 인허가 지연이 빈번한데 이러한 사업성과 무관한 지표로 부실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문제라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공정률이 당초 계획 대비 25%포인트를 하회할 경우 부실 우려 사업장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도 "최근 자잿값 상승과 공사비 갈등 등으로 공사 지연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대내외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기준"이라며 "공정률 20%포인트 정도는 장비와 인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돌관공사 등으로 공사기간을 맞출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건설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부실 PF 정리로 연대보증을 선 정상 사업장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시공능력평가 상위 100위권 밖의 중소 건설사들은 공사 수주를 위해 PF 자금 조달 때 연대보증, 책임 준공 등을 약속한 경우가 많다"며 "사업장 한 곳에서 자금 회수가 시작되면 다른 정상 사업장도 부실화될 수 있어 29일 간담회에서도 연대보증 단절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건의가 많았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간담회에서 건설업계의 의견을 반영해 브릿지론 만기를 3회 이상 연장했더라도 이자 연체 없이 정상 여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예외 사유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분양률 평가 기준도 당초 60% 미만이면 부실 우려로 보기로 한 것을 50% 미만으로 낮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건설업계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상가나 지식산업센터는 최근 공급과잉 이슈로 분양률이 저조하지만 평소에도 건물 완공 후 입지 등을 직접 봐야 팔리는 상품"이라며 "미분양에 따른 준공 위험도 등을 감안해도 분양률이 최소 30% 정도면 공사와 자금 회수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간담회에서는 최근 아파트값이 오르고, 거래가 늘어나는 등 주택경기가 회복 조짐을 보이는 만큼 금리 인하 등 수요 회복 방안을 병행해 달라는 주문도 이어졌다"며 "구조조정 시행 시기를 내년 초로 미뤄달라는 요구도 나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부실 정리 규모 커지나" 업계 긴장…"옥석가리되 속도조절을"
이번 정부의 PF 재구조화는 외환위기 이후 진행되는 3차 건설업 구조조정으로 건설업계에서 불린다.
외환위기 때는 동아건설을 비롯해 청구, 우방, 나산, 건영 등 아파트를 시작으로 유통·레저 등으로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나선 주택업체들이 상당수 부도를 맞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금융당국과 채권 금융기관의 대대적인 건설·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100대 건설사 중 절반에 가까운 45곳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과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채권단 관리를 겪거나 부도 또는 폐업 처리됐다.
이 시기에 금호산업, 쌍용건설, 풍림산업, 삼환기업, 벽산건설 등 상위 11∼20위 대형 건설사들까지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등에 들어가고, 단기간에 졸업했지만 과거의 위상과 영업력을 되찾은 건설사는 거의 없을 정도로 구조조정의 후폭풍은 거셌다.
올해 초 태영건설 워크아웃으로 시작된 PF 재구조화는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건설업계는 금융당국의 부실 우려 사업장에 대한 사전 통보가 시작된 가운데 당초 업계의 예상보다 그 폭이 커지는 것 아니냐며 긴장하고 있다.
일단은 분양률이 떨어지는 지방의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3∼4년 전 부동산 경기 호황기에 비싼 값을 주고 토지를 매입한 오피스텔, 생활형숙박시설, 지식산업센터 등 비아파트들이 타깃이 될 것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 지방 중소건설사와 시행사들의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도급(수주) 사업 위주로 사업을 진행하는 10대 대형 건설사들은 직접 PF 조달 규모가 크지 않고 부실 우려 사업장과 연대보증 등으로 묶인 경우도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다만 대형 건설사들도 브릿지론에서 본 PF 전환 시에는 책임 준공 약정이나 신용보강 등을 제공하고 있어 우발채무 발생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부동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22년 말 레고랜드 사태 때부터 시작돼야 할 구조조정이 선거 때문에 다소 늦어진 감이 있다"며 "이번 구조조정으로 3∼4년 전 부동산 호황기에 우후죽순으로 비싼 땅값을 주고 토지 매입에 나선 부동산 시행사나 주택업체들이 많이 정리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부실 사업장을 정리해 금융시장의 부담을 줄이는 PF 재구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최근 주택 공급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옥석 가리기를 넘은 과도한 사업장 정리나 속도전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급격한 건설업 구조조정은 자칫 공급 위축을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 박선구 경제금융실장은 "최근 공사비 상승으로 인해 건설업계 수익 구조가 올해까지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번 구조조정이 맞물리면서 부실 위험이 크지 않은 건설사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부실 정리가 '용두사미'가 돼선 안되겠지만 부실이 심각한 사업장부터 정리하고, 사업성이 있는 곳은 지원하는 등 세심한 판단과 속도조절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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