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정부가 27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열어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24조8천억원으로 책정했다. 이는 대규모 삭감 사태를 겪은 올해보다 2조9천억원, 13.2% 늘어난 수준이지만, 삭감 전인 지난해와 비교하면 1천억원, 그야말로 '찔끔' 증액된 것이다. 예산 복원은 그나마 다행이나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정부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제자리로 돌아갔거나 되레 줄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과학기술계 반응이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떨떠름해하는 이유다. 더군다나 지난 1년간 피폐해진 기초과학 연구 생태계나 예산 삭감 공방에 따른 사회적 비용 등을 따지면 이번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실패 사례로 지목될 만하다.
올해 R&D 예산 대폭 삭감은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적하면서 비롯됐다. 교육계에 이어 R&D 예산 분배도 '이권 카르텔'이 횡행하는 것으로 규정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감사원이 국책연구기관 감사에 착수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고, 정부도 예산 배분·조정안을 다시 짜면서 현장과 충분한 소통 없이 칼질에 나섰다. 그 결과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조차 늘렸던 R&D 예산이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전년 대비 무려 16.6% 깎였다. 이후 현장에서는 비용 감축, 연구 중단, 연구원 해고 등 부작용이 속출했다. 과학기술계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부적절한 집행이나 방만한 운영 등 비효율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 R&D 예산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좀비기업'이 수두룩하고 과제만 바꿔 연구비를 반복해 타가거나 연구자들끼리 과제를 쪼개 연구비를 나눠 먹는가 하면 여러 부처가 반도체 등 주목받는 분야에 연구비를 중복 집행하는 경우 등이 고질적 문제로 지목됐다.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내용상 환골탈태에 가깝게 달라졌다. 복원이나 회복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예산을 도로 되돌리면서 어떤 부분에서 구조조정이 이뤄졌는지, 소위 카르텔은 얼마나 밝혀냈는지 등을 소상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않는 한 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기초과학연구 생태계는 한 번 망가지면 원상으로 복구하기 쉽지 않다. 전문·과학 분야 비자발적 실직자가 전년 동기 대비 5개월 연속 늘어 지난 5월 현재 3만 명에 육박한다는 조사(더불어민주당 황정아 의원)도 있다. 일하고 싶어도 직장 휴·폐업, 명예퇴직·정리해고 등으로 놀고 있는 인력이다. 특히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길게는 몇십년을 지속해서 연구해야 할 기초 분야도 많다. 연구비 배분에서 수월성도 중요하지만, 다양성과 보편성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번엔 세부 예산 내역을 공개하지 않아 중단된 과제는 구제되는 것인지 등 현장 불안은 여전하다. 정부는 예산안이 확정되기 전까지 과학기술계와 지속해 소통하면서 미시 조정을 통해 무너진 연구 생태계가 시급히 복원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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