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난장판' 속 기성정치에 충격 준 日도쿄지사 선거

입력 2024-07-13 07:07  

[특파원시선] '난장판' 속 기성정치에 충격 준 日도쿄지사 선거
56명 역대 최다 후보 출마 속 일부 후보 돈 받고 선거벽보 자리 내주며 '돈벌이'
시골 시장 출신 2위 이시마루…기성정당 거리 두고 SNS 이용 젊은층 끌어들여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지구촌 여기저기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들려온다. 남미나 아시아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종주국으로 칭해지는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그렇다.
최근 치러진 일본 도쿄 도지사 선거의 어지러운 모습이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게다가 일본은 1955년 이후 몇년간을 빼고는 자민당이 '잃어버린 30년'으로 상징되는 경제 침체의 책임에도 수십년간 장기 집권을 해온 특이한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7일 투표가 치러지기까지 17일간 펼쳐진 선거 과정은 많은 일본인조차 얼굴을 찡그려야 할 정도로 난장판이었던 점은 분명하다.



과거부터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는 온갖 기행을 펼치는 후보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올해는 특히 희화화 정도가 심했다.
우선 출마한 후보자 수가 직전 2020년 선거 때 22명의 2.5배인 56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영화 배트맨의 조커 메이크업을 하고 활동해온 가와이 유스케 후보, 프로레슬러 복면을 하는 요코야마 미도리 후보 등 이미 여러 선거에 출마하며 기행으로 눈길을 받아온 단골 인사들도 빠지지 않고 출마했다.
가와이 후보는 개그맨으로도 활동하며 온갖 선거에 입후보해 기발한 TV 정견 방송으로 주목받다가 2022년에는 수도권인 사이타마현 소카시의 시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이번 선거 공보물에 '일부다처제'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번 도지사 후보 TV 정견방송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후보는 31세 여성 우치노 아이리 후보였다. 그는 정견 방송 도중 윗옷을 벗으면서 마치 상반신이 알몸(실제로는 살색 옷)인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귀여울 뿐만 아니라 섹시하죠"라며 자신의 혈액형, 좋아하는 단어 등 신변잡기를 늘어놨다.
그는 선거 공보물에 "정치에 흥미가 없던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할 것"이라는 출마 이유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일본 언론이 올해 선거의 최대 문제로 지적한 부분은 후보들이 홍보 포스터를 붙일 수 있도록 선거관리위원회가 1만4천 곳에 설치한 선거 게시판의 운용 차질이다.
일본은 선거 후보를 알리는 홍보 포스터를 담장이나 벽 등에 붙이지 않고 널빤지로 구성된 가설물을 별도로 설치해 선거 게시판으로 쓴다.
선관위가 선거 절차 개시 직전까지 설치한 게시판은 한 개에 48명분 공간만 확보돼있었다.
이에 선관위는 후보 8명에게는 선거 게시판 좌우나 아래쪽에 포스터를 붙일 수 있게 임시 조치로 클리어 파일을 제공했지만, 정상적인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후보들로부터 원성을 들어야 했다.



예상 인원을 넘은 후보가 출마한 배경에는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 있다. 이 당은 이번 선거에 24명을 출마시키는 방법으로 게시판 구역을 대량 확보하고서 기부자들로부터 돈을 받아 원하는 포스터를 일부 게시판에 24장씩 붙일 수 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선거 게시판은 선거와 무관한 홍보물로 도배되거나 유흥업소 광고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후보는 전라에 가까운 여성 포스터를 붙였다가 경찰로부터 조례 위반으로 경고받기도 했다.
선거 게시판의 포스터 내용에 원칙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는 현행 공직선거법의 맹점을 이용한 '선거 비즈니스'라는 지적도 나왔다.
공탁금 300만엔(약 2천560만원)만 내면 후보가 자신을 홍보할 TV 정견방송 기회와 홍보포스터를 붙일 공간이 제공되는 점을 악용해 모종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하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을 둔 후보가 예전에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거 게시판의 상당 부분을 '젯밥용' 포스터가 도배하면서 심각성이 도를 넘었다.
이에 따라 도쿄 도지사 선거 뒤 일본 정치권에서도 여야 모두 제도 보완책을 검토할 것이라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올해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기성 정당에 뿌리를 두지 않은 이시마루 신지(41) 전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 시장의 돌풍이다.
일본 언론들은 개표 결과 그가 165만8천여표를 얻어 3선에 성공한 고이케 유리코 지사(291만8천여표)에는 못 미쳤지만, 야당의 스타급 여성 정치인인 렌호(128만3천여표)를 누르고 득표율 2위를 차지하자 '쇼크'라는 표현을 쓰며 놀라워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그야말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그의 첫 공직 출마는 4년 전인 2020년에 이뤄졌다.
일본 대형 은행에서 일하다가 고향인 아카타카타시의 당시 시장이 뇌물 사건과 관련해 시장직을 사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회사에 바로 사표를 내고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아카타카타시는 인구 2만6천여명의 지방 도시였고 지금도 별다르지 않다.
그가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그나마 외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다. 그의 재임 시 아카타카타시의 유튜브 채널은 등록자 수가 20만명을 넘어서면서 도쿄도 등을 누르고 일본 지자체 중 1위를 차지했다.
젊은 시장인 그는 시의회 시정질의 때 코를 골며 자는 의원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시의회와 대립했고 이런 모습은 SNS를 통해 눈길을 받기 시작했다.
약 4년간의 시정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올해 5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도쿄도 지사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표명하고 시장직을 그만뒀다.
결국 그는 40여일 만에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최대 돌풍을 일으켰다. 뒷배경이 없는 그가 이뤄낸 돌풍 뒤에는 젊은 층 지지가 있다.
SNS를 통해 거리 연설 장면이 퍼지자 그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가 확산했다.
투표일 하루 전인 6일 밤 도쿄역 앞에서 진행한 마지막 연설에는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몰린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한분 한분의 조력에 의해 지금 이렇게 선거가 최고로 즐겁다"며 6월에 2억엔(약 17억원), 7월 들어서는 7천만엔의 후원금을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가 나온 유튜브 동영상에는 팬들이 뜨거운 애정을 담아 올린 댓글들이 달린다.
과거 한국에서 '정치인 노무현'을 지원한 '노사모'와 같은 팬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는 노 전 대통령과 적잖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의 연설에는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러나 엄숙을 떨거나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게 전달하는 힘이 있다. 일본의 젊은 층은 그에게서 기존 정치인에게서 보지 못한 희망을 엿본 것 같다.
명문가의 세습 정치인이 주도하는 일본 정치권에서 그는 그야말로 비주류다. "친척 중에 정치인은 한명도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시골 농가 2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중졸인 아버지는 버스 회사도 다녔지만, 집안 형편은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 경제 형편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고 명문 교토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도쿄역 주변 땅을 밟은 것도 대학 졸업 뒤 은행에 취업해 입행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라고 한다. 이 은행에서 상사의 눈에 들어 애널리스트로 성장했고 미주 지역 주재원 등으로도 근무했다.
선거 후 많은 일본 주류 언론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기존 정치권의 문법을 구사하지 않는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주류 언론에 적의적인 태도도 보여 벌써부터 일부 언론에서는 부정적인 기사도 나온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일본 젊은 층의 관심은 여전해 보인다. 지난 10일 밤부터 생방송으로 4시간 넘게 진행된 한 유튜브 채널에는 이튿날 새벽 2시 넘어서까지 1만명가량이 몰려 얘기를 들었고 슈퍼챗이 쌓였다.
옆 나라 일본에서 드물게 새로운 정치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향후 움직임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집권까지 성공할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다. 게다가 일본은 내각제여서 총리를 국민이 직접 뽑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의 앞에는 훨씬 많은 장벽이 놓여있다.
그러나 '이시마루의 도전'은 계속될 걸로 보인다.
그는 개표 후 인터뷰에서 향후 계획과 관련해 의사를 결정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중의원 지역구인 히로시마 1구 출마도 선택지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다만 기성 정당 참여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ev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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