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맵 발표 반년째 1단계도 착수 안 해…"연구용역 진행 중"
글로벌 스탠더드 맞추려면 '사전심의 의무' 조항 개선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선진국에서 찾기 힘든 정부 주도의 게임물 사전심의 제도를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표준)에 맞추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계획이 반년 가까이 첫 단추를 끼우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문체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자리에서 게임위가 쥐고 있는 게임물 등급 분류를 중장기적으로 민간에 완전히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1단계로는 게임물관리위원회가 PC·콘솔 게임 민간 등급 분류 기관인 게임콘텐츠등급분류위원회(GCRB)에 모바일 게임 등급 분류 업무를 위탁하고, 2단계로는 게임산업법 개정을 통해 GCRB에 청소년 이용 불가 게임 심의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계획이다.
GCRB와 자체 등급 분류 사업자의 경우 15세 이용가 이하 게임물은 자체적인 등급 분류가 가능하지만, 청소년 이용 불가를 상정하고 만든 게임물과 아케이드 게임은 반드시 게임위 심의를 받아야 한다.
지난 5월 '게임산업 진흥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는 2027년 이후 게임물 등급 분류를 완전히 자율화하고,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사후관리와 확률형 아이템 모니터링, 사행성 모사·아케이드 게임 심의 등만 담당하는 기관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하지만 27일 게임 업계에 따르면 게임위는 아직 1단계에 해당하는 모바일 게임 심의 업무 위탁도 시작하지 않았다.
현재 기준 사무국 직원이 5명에 불과한 GCRB도 모바일 게임 심의를 맡으려면 대규모 인력 충원과 조직 개편이 필요하지만, 이 또한 현재까지 큰 진전이 없다.
민간이양 계획이 맨 처음 발표된 지 6개월가량이 지났으나, 별도의 법 개정이 필요 없는 1단계도 착수하지 않은 셈이다.
게임위는 지난 2월 '게임물 등급분류 제도 개선방안 연구' 연구용역을 내고, 국내 법률·정책 전문가들에 의뢰해 현행 게임 심의 제도 현황과 개선점 등을 검토하고 있다.
연구용역은 현재 마무리 단계로, 결과 공개를 앞둔 것으로 전해졌다.
문체부 관계자는 "게임위가 곧바로 GCRB에 모바일게임 등급 분류 업무를 맡기기엔 인력, 예산 등 여러 여건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연구 결과가 나오면 이를 토대로 게임산업법 개정 논의와 함께 민간이양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GCRB의 확대 개편이 선행돼야 하는 만큼 실제 민간이양 로드맵의 이행 시점은 빨라도 올해 말에야 가능할 전망이다.
게임 업계에서는 GCRB 위탁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일 뿐, 진정한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까워지려면 자체 등급 분류 사업자로 지정된 앱 마켓, 게임 유통 플랫폼사 등에 심의 권한을 전면 이양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사전 심의를 받지 않은 게임물을 유통할 경우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게임산업법 조항도 문제다.
게임 분야 주요국 가운데 정부나 산하 공공기관이 게임물을 심의하고, 미심의 게임물을 유통하면 형사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게임 서비스 자체가 허가제인 중국, 베트남 등뿐이다.
게임위는 그간 이 조항을 근거로 심의받지 않은 성인용 게임의 국내 유통을 원천 차단해왔다.
작년 말에는 PC 게임 플랫폼 스팀에서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2종의 성인용 게임이 국내 인기 순위 1·2위에 나란히 오르자 게임위가 스팀 운영사 밸브 측에 요청해 국내 서비스를 차단했는데, 게이머들은 "성인이 성인용 게임도 못 하느냐"며 반발했다.
해외에서 널리 플레이되는 게임도 게임위 위원들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면 아예 성인도 플레이할 수 없도록 국내 발매가 금지되는데, 그 기준이 모호하고 자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격투 게임 '모탈 컴뱃' 시리즈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김관우 선수가 과거 여러 차례 출전했던 국제대회 'EVO'의 주요 종목 중 하나일 정도로 국제적인 인지도가 높으나 게임위는 과도한 폭력성을 이유로 번번이 국내 발매를 금지했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다룬 일본 게임 '뉴 단간론파 V3'의 경우 해외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됐고 시리즈 전작들은 국내에서도 유통됐지만, 국내 발매를 앞두고 인천에서 고교 자퇴생이 초등학생을 유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석연찮은 이유로 심의 거부 조치를 내렸다.
게임위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사회적 영향 등을 고려한 조치지만, 게이머들은 이런 방식이 일종의 '사전 검열'이라고 지적하며 2022년 사전심의 의무를 폐지해 달라는 국회 입법청원을 개시했다.
그러나 해당 청원은 1년 넘게 국회 문체위에 계류돼 있다가 작년 12월 '계속심사' 결론이 나오며 사실상 보류됐고,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당시 등급 분류 제도가 사전검열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 판례, 청소년 보호 필요성 등을 들어 '수용 곤란' 의견을 냈다.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 주요 게임 강국은 정부 기관이 아닌 민간 심의기구 또는 앱 마켓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게임물 심의를 담당한다.
공공기관이 등급 분류를 맡는 독일, 호주 등도 심의받지 않은 게임을 유통한다고 형사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정부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게임 심의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힌 이상, 궁극적인 지향점은 선진국들의 사례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게임산업 진흥 주무 부처인 문체부와 곧 위원장 교체를 앞둔 게임위의 혁신 의지, 게임 관련 정책을 만들고 여론을 수렴하는 22대 국회의 의지가 게이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심의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juju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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