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온 34도에도 100m 가까운 행렬…각료·국회의원들도 잇따라 참배
군복 착용 남성들 칼 들고 행진…일반 참배객 "새로운 총리는 참배하길" 주장도
(도쿄=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아이가 귀여운 손으로 참배하며 양손을 마주치는 것은 영령이 가장 기뻐할 모습입니다. 평화의 주춧돌이 된 영령들입니다. 후대에 전합시다. 남겨줍시다. 올해도 많은 분이 모이셨습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날이자 한국 광복절인 15일 오전 일본 우익의 성지로 불리는 도쿄 야스쿠니신사에서 한 남성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남성은 야스쿠니신사가 일본인이라면 남녀노소가 마땅히 찾아야 할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령'(英靈)이라는 단어를 무척 강조했다.
영령은 죽은 자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야스쿠니신사에는 1868년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내전과 일제가 일으킨 수많은 전쟁에서 숨진 246만6천여 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중 90%에 가까운 약 213만3천 명은 태평양전쟁과 연관돼 있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따라 처형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도 합사돼 있다.
즉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이 근대에 벌인 각종 전쟁에서 숨진 사람을 기리는 시설이다. 일본은 이들 덕분에 오늘날 평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패전일이 되면 군복 혹은 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집결하고, 참배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10시께 군복을 착용한 남성들이 칼을 들고 당당하게 야스쿠니신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이어 남색 제복을 입은 무리가 연이어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입장해 신사 남쪽에 자리를 잡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야스쿠니신사 핵심 건물인 본전(本殿) 근처까지 가서는 일제히 참배하고 일본 국가인 '기마가요'를 불렀다. 그들이 입은 제복 뒤에는 '나라를 구한다'는 뜻의 '구국'(救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본이 과거에 일으켰던 전쟁에 대한 참회, 역사에 대한 반성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참배객은 작년보다 더 많은 듯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본전에서 약 100m 거리까지 줄이 만들어졌다. 이날 야스쿠니신사가 있는 도쿄 지요다구는 정오께 기온이 34도까지 올랐으나, 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야스쿠니신사 경내에서 만난 50대 일본인 남성은 "평화를 구축한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년 신사를 찾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과 중국 정부가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공물 봉납을 반대한다고 이야기하자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며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뒤를 이을 새로운 총리와 각료도 참배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남편과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한 50대 여성도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전쟁으로 희생된 분들이 잠들어 있다고 배웠다"며 "남편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어 해마다 들른다"고 했다.
이 여성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은 맞지만, 한국이 유독 일본에 반대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기자에게 오히려 그 이유를 되묻기도 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경로로 야스쿠니신사에 들어가 참배했다.
패전일과 주요 제사 기간마다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은 이날도 신사를 참배한 뒤 취재진과 만나 "목숨을 바친 분들의 영혼에 대해 존숭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뜻을 바치고 유족 건강을 빌었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이 탑승한 차량이 신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참배객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하기도 했다.
이외에 기하라 미노루 방위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기시다 총리는 직접 참배하는 대신 집권 자민당 총재 자격으로 공물 대금을 봉납했다.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2013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일본여론조사회가 지난 6∼7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일본인 65%가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2015년과 비교하면 10%포인트 상승해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우익 성향 산케이신문은 이날 1면에 게재한 논설을 통해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전몰자와 약속"이라며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각료, 총재 선거 입후보에 뜻을 둔 정치가들은 종전일과 춘계, 추계 예대제(제사) 등 기회에 참배해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신사 경내에 있는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에는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중 4학년생이 그린 한 작품에는 한반도와 만주, 인도네시아 등이 일본과 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영토를 표시한 듯했다.
문득 이 학생은 당시 일본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스쿠니신사를 나오면서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한국과 일본 간 역사 인식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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