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가열되는 미국 대선 레이스에 유럽연합(EU)이 '개입'했다는 시비가 불거졌다.
국무위원에 해당하는 EU의 티에리 브르통 집행위원이 지난주 엑스(X·옛 트위터)를 소유한 일론 머스크에게 보낸 '경고 서한'이 발단이 됐다.
브르통 집행위원은 12일(현지시간) 공개한 서한에서 영국의 극우폭력 시위와 머스크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온라인 생중계 대담을 언급하면서 EU 디지털서비스법(DSA) 준수를 강조했다.
그는 엑스 전체 이용자의 3분의 1이 EU에 있고 생중계를 EU 이용자도 접할 수 있다면서 "유해 콘텐츠 확산 방지를 위한 효과적인 확산 방지 조처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EU 내 엑스의 불법 콘텐츠에 의한 부정적 효과는 진행 중인 (DSA 조사) 절차와 엑스의 EU법 준수 여부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관련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담 생중계 과정에서 '허위', '유해' 콘텐츠가 유포될 가능성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사실 EU가 DSA가 시행되자마자 주요 플랫폼을 겨냥해 칼을 빼든 점을 고려하면 DSA 집행을 총괄하는 브르통 집행위원의 서한은 의례적인 절차로 보인다.
문제는 '발송 시점'이었다.
브르통 집행위원이 하필 서한을 머스크와 트럼프 대담을 불과 몇시간 앞두고 보냈기 때문이다.
린다 야카리노 엑스 CEO는 "유럽에서 적용되는 법을 미국 내 정치 활동으로 확장하려는 전례 없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캠프는 "EU는 미국 대선에 개입하지 말고 자기 일이나 신경 써야 한다"라고 비난했다.
결국 EU 집행위는 하루 뒤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대선 개입 의도가 없었다"며 수습에 나서야 했다.
특히 집행위 대변인실은 브르통 집행위원의 서한이 사전에 조율된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집행위원이 EU 입장을 대표하는 창구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하루만에 입장을 번복한 셈이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은 EU가 머스크를 겨냥해 한 방을 날렸지만 역풍을 맞았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집행위 내부에서조차 브르통 집행위원이 DSA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2월 전면 시행된 DSA는 온라인상 특정 인종, 성, 종교에 편파적인 발언이나 테러, 아동 성 학대 등과 연관 있는 유해·불법 콘텐츠가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이다.
엑스를 비롯한 EU 내 월평균 이용자 수가 4천500만명을 넘는 플랫폼이 '초대형 온라인 플랫폼'(VLOP)으로 지정돼 유해 콘텐츠 확산 방지에 관한 더 엄격한 의무가 부여된다. 위반 시 전세계 매출 6%까지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을 만큼 처벌 조항도 강력하다.
EU는 원칙적으로 역내 이용자에게 해를 끼치는 혐오·차별 등 유해 콘텐츠 차단이 DSA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의 취지와 명분과 달리 막상 현실에선 '국경 없는' 온라인 특성상 피해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 자체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법 위반 판단을 둘러싼 공정성 혹은 정치적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DSA는 우선적으로 대형 플랫폼들이 유해 콘텐츠에 자발적인 조처를 하도록 규정하는 탓에 자칫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EU 안팎에서는 이번 '서한 해프닝'을 계기로 신생 SNS 규제인 DSA의 안착 여부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그 성패가 판가름 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shi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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