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지정 대신 '사후추정' 채택…신속한 사건처리 '물음표'
공정거래법 개정 추진, 플랫폼산업 체계적 규제 한계 지적도
(세종=연합뉴스) 박재현 기자 = 정부가 '플랫폼 공룡'의 반칙행위를 막는 카드로 공정거래법 개정을 공식화하면서, 당초 추진된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법) 제정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던 '온라인 플랫폼법'(온플법)이 윤석열 정부 들어 폐지된 데 이어 플랫폼법마저 엎어지면서 '플랫폼 규제 법제화'가 한 걸음 더 후퇴했다는 평가다.
사전지정제도의 대안으로 내놓은 '사후 추정'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매출 기준과 점유율 요건이 설정되면서 쿠팡과 배달의민족(배민) 등 주요 온라인 플랫폼들은 규제를 피해 갈 가능성이 커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을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당초 밝힌 '사전 지정' 방식이 아닌 '사후 추정' 방식을 통해 지배적 플랫폼을 특정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시장법(DMA)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사전 지정 방식은 매출액, 점유율, 이용자 수 등을 고려해 지배적 사업자를 미리 정해 공표하고, 관련 법 위반에 대해 처벌하는 방식이다.
반면 공정위가 꺼내든 사후 추정 방식은 실태조사를 통해 매출액과 점유율 등을 파악한 뒤, 법 위반 행위가 발생하면 지배적 플랫폼에 해당하는지 판단해 처벌하는 구조다.
쉽게 말해, 법 위반 행위가 발생하면 사후적으로 지배적 사업자 여부를 가리겠다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사전지정을 하지 않아도 신속히 사건을 처리할 수 있고 법 위반 예방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이 없을지 고민했다"며 "고민 끝에 채택한 것이 사후 추정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업계와 전문가, 관계부처 의견을 종합 검토했다고 부연했다.
이는 당초 플랫폼법의 추진 목표였던 '신속한 사건 처리'와는 거리가 먼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전 지정 방식은 법 위반 행위 이전에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돼 공표된다. 지배적 사업자로 정해진 기업이 불복하게 되면 별도 절차를 통해 다투게 된다.
이런 절차를 거쳐 지배적 사업자로 최종 지정되면, 위법행위 발생 시 '경제분석 과정'을 건너뛰고 불법행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 조사와 심의가 이뤄진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심사관과 피심인 간 의견 대립도 치열한 경제분석 과정이 사라지는 만큼, 신속한 사건 처리가 가능하다.
반면 사후 추정 방식에서는 불법행위로 인해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되는 업체가 불복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후적으로 추가 경제분석이 진행되면서 신속한 사건 처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동안 공정위가 우려했던 '사후 약방문식 대응'으로 귀결될 우려가 크다는 의미다.
제정법이 아닌 법개정 방식을 택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플랫폼이라는 신(新)시장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불공정 행위들을 폭넓게 규율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제정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공정위 역시 이러한 여론을 고려해 당초 플랫폼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시장의 수용성과 정합성 등을 고려해 기존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급성장하는 플랫폼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기존 법을 개정하는 대응으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배적 플랫폼을 사후 추정하는 요건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개정안은 ▲ 1개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60% 이상이고 이용자 수가 1천만명 이상인 경우 또는 ▲ 3개 이하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85% 이상이고 이용자 수가 2천만명 이상인 경우를 지배적 플랫폼 지정 요건으로 정했다.
다만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연간 매출액 4조원 이하 플랫폼은 규율 대상에서 빠진다.
지난해 매출액을 기준으로 개정안에 담긴 '사후 추정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은 구글과 애플, 카카오, 네이버 정도로 분석된다.
쿠팡이나 배민 등 플랫폼들은 매출액 또는 시장 점유율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유력 플랫폼인 '네카라쿠배당토'(네이버·카카오톡·라인·쿠팡·배달의민족·당근·토스) 중 단 두 곳만이 규율 대상이 되는 것이다.
'네카오'를 제외한 다른 플랫폼에서도 이미 자사 우대나 최혜 대우 요구 등 불공정 행위 의심 정황이 다수 적발되고 있는 만큼, 제재 대상을 좀 더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해외 플랫폼과의 '역차별' 우려도 제기된다. 해외에 본사를 둔 플랫폼들이 매출액 등 자료 제출 요구에 성실히 응하지 않는 경우, 공정위가 이에 대해 실효적인 대응을 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만 공정위는 "해외 플랫폼의 불공정 행위를 적발하고, 대규모 과징금 등 제재를 끌어낸 전례가 이미 매우 많다"며 "자료 확보를 비롯해 모든 사안에 대해 국내·국외 기업 간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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