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이튿날 미국 이어 한국 정상과 통화…'11일만에 통화' 기시다보다 훨씬 빨라
국회 연설서 "한일 협력 매우 중요"…미래지향 관계 위해 역사 현안 간극 좁혀야
(도쿄=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일본 총리가 3년 만에 바뀌었다. 집권 자민당 내에서 오랫동안 비주류 인사였던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지난 1일 취임하면서다.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대립하기도 했던 그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소극적이고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비교적 온건한 목소리를 내온 이른바 '비둘기파'로 분류된다.
현재 한일관계는 이시바 총리 전임자인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 취임 당시와 비교하면 크게 달라졌다.
2021년 10월 4일 취임한 기시다 전 총리는 열흘가량 흐른 같은 달 15일이 돼서야 당시 한국 정상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통화했다.
기시다 전 총리는 문 전 대통령과 통화에 앞서 미국, 호주, 러시아, 중국, 인도 정상 등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는 취임 다음날인 이달 2일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한 데 이어 오후에 곧바로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했다.
그날 이시바 총리가 통화한 순서를 보면 미국, 한국, 호주 순이었다.
이는 그가 지난 1일 취임 당일 첫 기자회견에서 정상외교 방침에 대해 답할 때 미국, 한국, 호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순으로 언급한 것과 같았다.
이시바 총리는 4일 첫 임시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도 한일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 전략 환경 아래서 한일이 긴밀히 협력해 나가는 것은 쌍방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며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와 윤석열 대통령이 쌓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일 양국의 협력을 더욱 견고하고 폭넓은 것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기시다 전 총리가 2021년 10월 취임 후 첫 국회 연설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라면서도 한국 측에 한일 갈등 현안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시바 총리는 북한과 중국의 군사 위협으로 동북아시아 정세가 한층 엄중해진 상황을 고려해 한국과 안보·경제 협력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가 기본적으로 보수 정당인 자민당 출신이고 정상 간 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하겠다고 강조한 점을 고려하면 향후 한국과 얽혀 있는 역사 문제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기시다 전 총리는 재임 3년간 성과 중 하나로 한일관계 개선을 꼽을 정도로 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지만, 역사 문제와 관련한 그의 언행은 많은 한국인이 바라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징용 배상 해법을 내놓은 이후 '사죄'나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고, 한국을 찾았을 때 사견임을 전제로 해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했다.
아울러 한국이 국내 재단을 통해 일본 피고 기업 대신 징용 피해자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해법을 제시한 데 대해서도 기시다 정부는 일관되게 이 문제가 한국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 일본 측이 '물컵의 남은 절반'을 채워주길 희망했지만, 일본은 이러한 기대를 외면했다.
지난해 100주년이었던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인정에 대해서도 기시다 내각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가미카와 요코 전 외무상은 지난달 13일 기자회견에서 간토 학살 관련 질문에 "정부 내에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인식에 변함이 없다"고 답했다.
기시다 정권 시기 일본 각료들은 간토 학살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답변을 되풀이했다.
다만 올해 일본에서는 간토 학살과 관련해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지난달 1일 자민당 출신 총리로는 처음으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도쿄본부가 개최한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했다.
아울러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지사와 지바현 지사는 각각 최초로 지역 내 관련 행사에 조선인 추도 메시지를 보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주년 희생자 추도대회 실행위원회는 간토 학살과 관련된 학술 성과를 모아 '간토대지진 100년의 지금을 묻는다'라는 책을 펴냈다.
집필자로 참여한 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스즈키 도시오 대표위원은 서문에서 "간토대지진에서 학살된 사람들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주체가 하는 추도"라며 "학살 사실에 진지하게 마주하고 정부 책임을 밝혀 사죄, 배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바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은 과연 기시다 정권이 모르쇠로 일관했던 간토 학살과 남 일처럼 인식한 징용 배상 등에 대해 변화된 모습을 보일까.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양국이 역사 문제에 대한 간극을 좁혀 나가지 않으면 탄탄한 미래지향적 관계도 구축되지 않을 것이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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