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였던 공간 활용…산업적 건축물로 인간 취약성·회복력 탐구
이미래 "상처와 계속 함께 사는 것, 내게는 아름다움"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영국 대표적 현대 미술관 테이트 모던의 터바인 홀에서 7m 길이의 터빈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천장에 달린 54개의 쇠사슬에 빛바랜 분홍빛 천 조각들이 늘어져 있다.
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쉬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소리도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개막을 하루 앞둔 8일(이하 현지시간) 언론에 먼저 공개된 한국 작가 이미래(36)의 '현대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다.
전시는 미술관이 되기 전 화력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에서 발전기가 있었던 공간인 터바인 홀의 특성을 살렸다.
새로 제작해 설치한 터빈을 계속 돌리고 쇠사슬과 철근을 동원하면서도 이를 생물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체, 특히 내장을 닮은 공간으로 창조해 산업 사회와 노동, 그 안에서 인간의 취약성과 회복력을 탐구한다.
이날 언론 앞에 선 이미래는 "미술관이 되기 전 옛 이미지를 보고선 이곳을 프러덕션(생산)의 장소로 되살리려는 상상력에서 출발했다"며 "중심이 되는 터빈을 심장처럼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열린 상처'라는 전시 제목과 주제에 대해선 "산업주의 자체가 어떤 횡포라고 보는 부분이 있다"며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예술가의 상처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상처는 열린 채로 닫히지 않는다는데 방점을 뒀다"며 "상처와 계속해서 함께 사는 것,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현대 커미션'은 현대자동차와 테이트 미술관이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터바인홀에서 신작 전시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루이스 부르주아, 올라푸르 엘리아손, 애니시 커푸어, 아이웨이웨이 등 주목받는 작가들이 전시했다. 2021년 한국계 미국인 아니카 이가 참여했고, 한국인 작가는 이미래가 처음이다.
카린 힌즈보 테이트 모던 관장은 "이미래는 올해 전시에 완벽한 선택"이라며 "터바인 홀은 매년 수백만의 관람객이 들어서며 만나는 첫 공간인 만큼 경이로운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해주기를 바라는데 그게 바로 이미래가 해낸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래는 올해 작가로 초청된 데 대해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다 보니 제가 무서워하기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별로 무섭지는 않았고 신났던 게 더 컸다"며 웃었다.
이번 전시는 바닥 면적 3천300㎡(약 998.25평)에 높이 35m의 대형 공간인 터바인 홀의 공간성을 활용해 트인 구조로 터빈과 철골,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직물들을 더 부각한다.
터빈이 달린 크레인은 발전소 철거 후에도 남아 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천장에 잔뜩 매달린 쇠사슬은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가기 전 개인 소지품을 도르래로 천장에 매달아 보관하던 광부들의 탈의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가죽'으로 이름 붙인 직물은 현재 100개지만, 전시 기간 터빈이 작업을 계속하면서 전시장에 추가돼 내년 3월 7일 폐막 즈음엔 150여 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래는 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했고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의 뉴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최근 주목받는 작가다.
그동안에도 기계 장치, 비계 등을 활용해 유기체나 생물처럼 작동하는 작품을 선보였고, 이런 작품은 그동안 '기괴하다', '불편하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얻었다.
이미래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아주 다양한 아름다움, 미적 경험이 세상에 있지만 내게는 아름답다는 경험이 '가슴이 아프다'는 경험과 자주 연관돼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16일까지 이어진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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