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요리예능' 원조 "수백만원짜리 코스라니? 셰프는 겸손해야"

입력 2024-11-15 06:11  

[사람들] '요리예능' 원조 "수백만원짜리 코스라니? 셰프는 겸손해야"
요식업계 선구자 노희영 전 CJ 고문, 흑백요리사 신드롬 관련 인터뷰
"안성재와 인연, 음식 열정 남달랐지만 시대 너무 빨리 앞서가"
"한국 파인다이닝은 수익 어려운 구조, 변화 않으면 도태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넷플릭스의 서바이벌 요리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계급전쟁>이 요즘 정말 핫 하다. 프로에 출연한 셰프들이 대거 스타로 떴고, 미쉐린 3스타인 심사위원 안성재(42)는 남다른 개성을 발산하며 국민셰프로 떠올랐다. 요리 열풍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K컬처의 개척자로 불리는 노희영(62) 식음연구소 대표와 만나 흑백요리사 인기에 가린 셰프들의 애환과 파인다이닝(프리미엄 식당)의 현실을 들어봤다.



-- 국내에 요리 예능을 도입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
▲ 2010년 '올리브'를 푸드 전문 채널로 만든다고 할 때 다들 '그런 걸 누가 보냐'며 반대가 많았다. CJ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이 "콘텐츠 시대가 반드시 온다"며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다. 그때 출연한 요리사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에도 스타셰프들이 탄생했다. 나는 기획자로서 그들을 돕는 조연이었지만,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면서 대중에 얼굴을 알리게 됐다.

-- 흑백요리사로 음지의 셰프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 영국 BBC가 제작한 '마스터셰프'의 판권을 사들여 마셰코(마스터셰프 코리아)를 만들었다. 2012년 마셰코를 올리브 채널에 론칭해 시즌 4까지 만들었는데 그때 나와 함께 심사위원을 맡은 사람이 강레오, 김소희, 김훈 셰프였다. 마셰코가 기대 이상으로 인기를 끌자 후속으로 한식대첩을 만들었다. 시즌 5까지 제작했는데 심영순, 백종원, 최현석 셰프가 심사위원으로 나와 인기를 모았다. 두 예능에서 입상한 사람들이 이번에 '백수저' 요리사로 대거 출연했다. 흑백요리사 열풍도 이런 흐름에서 봐야 한다.



-- 안성재와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 안 셰프는 CJ에서 운영한 일식 파인다이닝 '우오'의 대표 셰프였다. 2011년 영입하기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한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식품과 외식을 비롯한 CJ의 모든 브랜드를 관장했는데 권우중 등 대기업 출신이 아닌 셰프들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받아들였다. R&D(연구개발) 역할을 하게 하고, 그들의 노하우로 대중적 음식을 만들려고 했다.

-- 안성재 식당은 장사가 잘 됐나.
▲ '우오', '다담'과 같은 파인다이닝은 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자신의 음식에 대한 프라이드와 고집이 셌던 것으로 기억한다. (웃음) 그때까지만 해도 미쉐린이나 파인다이닝이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다. 고객들이 안 셰프 음식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져 소비하기 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알려지지 않은 얘기다.
▲ 내가 그때 안 셰프에게 한 말이 있다. "요리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손님이 와야 맛을 보여줄 거 아니냐"고. 돌이켜보면 안 셰프는 지금 자신이 운영하는 '모수'를 '우오'에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떠받쳐줄 시장이 없었다. 시대를 너무 빨리 앞서갔던 것이다.



-- 지금 파인다이닝의 현실은 어떤가.
▲ 그때나 지금이나, 한식이든 일식이든 양식이든 파인다이닝은 이익을 담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미쉐린 가이드에 국내 한식당 중 유일하게 3스타를 받은 '가온'도 얼마 전에 문을 닫지 않았나. 한국 사람들은 한 상 차림에 익숙한 데다 성격도 급해(웃음) 천천히 제공되는 코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참으로 적다. 셰프가 고객들 앞에 나와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 설명을 해도 대부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유명 셰프들이 대기업 펀딩을 받고 식당을 운영하는 이유다. 웃픈 현실이다.

-- 불편한 진실 같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 파인다이닝은 주류 세일즈다. 그러나 한국은 밥집과 술집을 구분해서 소비한다. 요즘 바뀌고 있다지만 술은 밥 먹고 2차 가서 소비한다. 밥값만큼 와인을 마시는 것을 에티켓으로 여기는 외국과는 다른 문화다. 코스는 또 식사시간이 길어 점심, 저녁 1타임씩 밖에는 운영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수익이 나는 구조가 아니다.

-- 200만원 넘는 코스도 등장했다. 이참에 가격을 올려받는 분위기인데.
▲ 이 나라에서 그 큰돈 주고 다시 식당을 찾아갈 고정 고객이 얼마나 될까. 호기심에서 큰마음 먹고 가는 손님이 절대 다수다. 아주 미식가나 거부가 아니라면 코인으로 돈 번 젊은 사람들, 사진 찍으며 플렉스(Flex. 부를 과시) 하려는 인플루언서 정도다. 문제는, 이들이 또 다른 트렌드나 대안이 생기면 쉽게 이동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셰프는 항상 겸손하고 냉정해야 한다..



-- 국민들이 맛에 민감한 편인가.
▲ 요식업에 몸 담은 지 30년이 넘었고 1년에 절반을 외국에 나가 글로벌 트렌드를 파악하는데, 우리들만큼 외국 음식에 배타적인 국민이 없다.(웃음).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태국과 베트남 음식도 유독 한국에선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

-- 엄마가 만들어주는 집밥이 가장 맛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 프랑스, 스페인, 뉴욕 등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나 도시에 가도 며칠만 지나면 한식을 찾는 게 우리 국민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라면과 김치찌개 당기지 않나. 한편으론 이런 중독성이 한식 세계화를 만든 요인일 수 있다.

-- 그렇다면 한식 파인다이닝도 잘 돼야 정상 아닌가.
▲ 쉬운 예를 들겠다. 같은 코스 요리라도 한식은 그릇 수만도 일식, 양식보다 몇 배 더 많다. 기본 반찬 가짓수도 많아 식재료값이 많이 든다. 그래서 막대한 인건비에 허덕인다. 애국심 없으면 한식당 하기 어렵다. (웃음) 한식 코스요리의 효시인 '용수산' 같이 역사와 스토리를 지닌 전통 한식점은 나라에서 상이라도 내리고 지원해야 한다.



-- 흑백요리사가 한식 발전에 순기능을 하지 않을까.
▲ 물론인데, 한편으론 걱정도 든다. 국민들이 흑백요리사를 일종의 아이돌로 인지하는 것 같다. 요리사의 맛 철학과 음식보다 인간적 부분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말 잘하고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이 대중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어그로'(과한 언행)는 얼마 못가 바닥을 드러내고 실망으로 이어진다. 벌써 일부는 요리 실력이 아닌 도덕적 문제로 인해 시끄럽지 않나.

-- 흑백요리사 시즌 2가 나온다는데.
▲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셰프가 가진 요리 철학, 식재료에 대한 마인드,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음식으로 표현하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그래야 요리 붐을 조성해 자영업자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 제2의 안성재를 꿈꾸는 미래 셰프들에게도 한마디 해달라.
▲ 예능 프로로 셰프들이 스타로 뜨고 또 요리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돼가는데, 그럴수록 더욱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젠 잘 차려입고 두어 시간에 걸쳐 코스를 즐기는 모임이 사라지고 있다. 모바일로 언제든 대화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미쉐린도 평가 척도를 바꾸려 한다고 들었다. 어떤 분야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 노희영은 누구?
요식, 패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오리온 그룹에서 '베니건스'와 '마켓오' 개발을 담당했고 CJ 전략 고문 시절 '비비고' '계절밥상' '올리브영'을 브랜딩했다. 유명 브런치 레스토랑 '세상의 모든 아침'과 미쉐린 2스타를 딴 한식당 '곳간'을 만들었다. 2014년 CJ를 나온 뒤 YG푸즈 대표를 거쳐 현재는 ㈜식음연구소 대표로 있다. 여의도의 고급 중식당인 '백원'과 파리에도 팝업스토어를 연 고기 전문 체인 '삼거리푸줏간', 평양 냉면 전문 체인 '평양일미' 등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명문 사립인 USC(남가주대) 의대를 다니다 진로를 바꿔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 '설국열차' '국제시장' 등 숱한 메가 히트작을 기획했다.
jahn@yna.co.k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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