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나토 회원국에서 '반나토' 극우 후보 최대 이변
성난 농심과 기성 정치불신이 부른 '무명 후보의 승리'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무소속 극우 후보인 컬린 제오르제스쿠(62)가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선거 전 여론조사 때만 해도 그의 지지율은 5.4%로 대선후보 13명 중 6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기타 후보군으로 묶일 만큼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22.95%의 득표율로 1위에 오르며 중도우파 야당 루마니아 구국연합(USR)의 엘레나 라스코니 대표(19.17%)와 함께 12월8일 결선 투표에 나서게 됐다.
루마니아 대선은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득표 1위와 2위 간의 결선 투표로 당선자를 가린다.
루마니아 선거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꼽힐 정도로 제오르제스쿠 후보의 약진은 충격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오르제스쿠 후보의 돌풍 속에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였고 루마니아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PDS) 대표 겸 현 총리인 마르첼 치올라쿠 후보는 3위에 그쳤다. 치올라쿠 총리가 조기 탈락하면서 루마니아는 1989년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처음으로 사회민주당 후보 없이 대선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됐다.
제오르제스쿠 후보 웹사이트에 따르면 그는 토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0년대 루마니아 환경부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 유엔 환경 프로그램 국가위원회에서 루마니아 대표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국제사회는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루마니아에서 친러시아·반나토 성향인 그가 유력한 대권 주자로 등장한 현실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오르제스쿠 후보는 한때 루마니아의 극우당 결속동맹(AUR)에 몸담았으나 친러시아 성향과 나토에 반대하는 언행으로 당내에서 논란을 빚다 2022년 당을 떠났다.
그는 2020년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며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그의 친러시아 성향은 이번 대선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지난 13일 대선 토론에서 '푸틴 대통령을 존경하느냐'는 대담자의 질문에 "그 사람이 그 나라의 애국자라면 그건 그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루마니아는 EU 회원국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가장 길게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다.
나토의 동부 방어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이번 전쟁을 맞아서는 우크라이나에 곡물 수출길을 제공하는 등 우크라이나를 강력히 지원해왔다.
반대로 루마니아 농민들은 저렴한 우크라이나 곡물이 유입돼 자국 농산물의 경쟁력이 급감하자 국경 봉쇄 시위에 나서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이는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특히 농촌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은 원인으로 꼽힌다.
그는 루마니아 농민 지원 공약을 내세우고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개혁과 에너지·식량 생산 증대와 함께 루마니아 문화를 강조했다.
그는 투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불의, 모욕당한 사람들, 자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 투표했다. 이 투표는 국가를 위한 기도"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투표 결과에 대해 "국민들의 놀라운 각성"이라고 자평했다.
루마니아 유권자들 사이에서 기존 정치 체제와 부패에 대한 불만이 만연한 상황에서 어느 정당에도 묶이지 않은 그를 대안으로 선택했다는 분석도 있다.
루마니아의 국제 관계 전문가인 발렌틴 나우메스쿠는 "많은 좌절과 반항, 체제에 대한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보복 투표, 항의 투표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그는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틱톡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선거운동을 통해 "그는 진정한 루마니아 사람이고, 루마니아의 강력한 지도자이며, 계획이 있고,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을 심어줬다"고 덧붙였다.
정치 컨설턴트 크리스티안 안드레이는 예상치 못한 제오르제스쿠 후보의 선전은 "기존 체제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라고 AP 통신에 말했다.
chang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