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
[캠퍼스 잡앤조이=박해나 기자] 문과라서 죄송해야 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문과생존원정대. 철학을 만나고 문학을 사랑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대를 만나고 깨달았노라!
문과생존원정대(이하 문생원)는 문과생의, 문과생에 의한, 문과생을 위한 페이스북 페이지다. 2014년 처음 세상에 등장해 현재까지 200여 명의 문과생 인터뷰를 연재했다. 문과생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와 고민 등을 다루며 높은 인기를 얻었고, 구독자 수는 페이스북 8만, 네이버 포스트 1만 8천 명을 넘어섰다. 최근에는 ‘문과생존원정대 : 어쩌다 살길 찾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 문과생존원정대 콘텐츠 일부 (문과생존원정대 페이스북 캡처)
얼떨결에 8만 문과생의 원정대장이 된 ‘뼈문돌’
원정대장 고재형(29) 씨는 ‘뼈문돌’(뼛속까지 문돌이)이다.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수학·과학 과목의 성적은 보잘 것 없었다. 고등학교 때 살짝 맛본 중국어에 흥미를 느껴 대학 전공을 중어중문학으로 정하며 완성형 문돌이로 거듭났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서 접한 전공은 영 재미가 없었다. 중어중문학과의 특성상 중국어를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화교와 유학생이 넘쳐나는 학과에서 그는 점점 열등생이 되어갔고, 자연히 학과 공부에도 흥미를 잃게 됐다.
“학교를 휴학하고 문과생 6명이 모여 진로 교육 관련 창업을 했어요. 창업이라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모두들 고군분투했고, 새벽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죠. 어느 날 팀원 중 한 명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푸념을 해 바람도 쐴 겸 영화를 보러갔어요. 그 영화가 문생원의 시작이 됐습니다.”
지구 대신 다른 행성을 찾아 우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SF 영화 ‘인터스텔라’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인류 종말의 위기를 맞은 지구 대신 생존 가능한 다른 행성을 찾아 우주를 여행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모두 ‘공대생’이었다. 비공대생이 한 명 등장하긴 했지만 하는 일이라곤 옥수수를 키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나중에는 불타 없어지는데 비공대생 조연은그 모습을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 씨와 문과생 동지들은 영화관을 나와 허탈한 마음으로 술집으로 향했다. ‘문과생은 지구 종말이 와도 옥수수밖에 키울 수 없다’는 신세한탄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문과생은 바다 건너 생존 원정이라도 떠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에 돌아오며 재미 삼아 ‘문과생존원정대’라는 페이지를 만들고 문과생을 조롱하는 ‘짤방’ 하나를 올린 뒤 잠이 들었죠. 다음 날 일어나니 ‘좋아요’ 숫자가 1만 명으로 늘었더라고요. 일주일 후에는 3만 명이 됐고요. ‘문과생을 위한 페이지가 드디어 나온 것이냐’, ‘어떤 콘텐츠를 올리는 페이지냐’ 등 메시지가 빗발쳤어요.”
페이지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고 씨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로 날아간 대원들처럼 대한민국 문과생의 취업을 책임지고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부담을 감당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던 그는 고민 끝에 페이지를 접을 요량으로, 카드 뉴스를 통해 고해성사를 했다. ‘나는 평범한 중문학도이며 전공과 상관없는 창업을 했다’ 등의 내용을 올리면 ‘뭐야, 시시해’라며 모두가 떠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열광했고, 다음 편을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약간의 용기도 생겼다. ‘문과생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그저 공감할만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 씨는 얼떨결에 8만 문과생을 이끄는 원정대장이 돼버렸다.
전공 못 살리면 낙오자? 알아서 잘 살테니 잔소리는 그만
고 씨의 고해성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0명의 문과생의 이야기가 문생원을 통해 연재됐다. 시즌별로 인터뷰의 주제는 달라졌는데, 문과생 공감 시리즈(시즌 1)부터 전공을 살려 취업한 문과생(시즌 2), 전공과 다른 길을 찾은 문과생(시즌 3)의 스토리가 이어졌다.
시즌 1 때는 고 씨가 대학교 재학 중이라 학교 안에서 문과생이 느끼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각 학과별 인터뷰이가 들려주는 고민과 편견, 에피소드를 다뤘다. 시즌 2부터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걷는 문과생에게 주목했다. 전공 관련 직업을 찾았든 아니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저는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는데, 전공을 살려 취업하지 않으면 낙오자 취급을 받더라고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문과생이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진로를 찾고 있잖아요. 그것이 전공과 관련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과 조언에 너무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전공 관련 직업을 찾은 문과생을 인터뷰한 시즌 2 때는 많은 문과생이 희망을 얻었다. 출판사에 입사한 문학창작과 졸업생, 초등교사가 된 교대생의 인터뷰 등을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서로를 응원했다.
“시즌 3 때는 진성 독자가 많이 늘었어요.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취업한 사례나 행정학과를 나와 사진작가가 된 이야기,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바(bar)를 운영하게 된 사연 등이죠. 단편적으로 보면 희망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해진 트랙을 걷지 않아도 나름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이 섭외는 ‘지인 찬스’를 활용했다. 주변에 널린 것이 문과생이다 보니 ‘삼겹살 사주겠다’며 친구를 꼬여내거나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문과생 중에서도 재미있게 사는 친구들을 수소문했는데,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보다는 학교 밖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을 소환했다.
인터뷰이를 섭외하면 일단 사전 질문지를 보내고 답변은 대면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가능한 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 했고, 정 사정이 안 될 경우는 전화 인터뷰라도 시도했다.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인터뷰를 위해 커피 사고, 밥 사고, 술 사는 비용은 모두 고 씨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간혹 ‘문생원으로 돈 좀 벌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광고 등으로 간간이 들어온 수익은 모두 이런 식으로 인터뷰이에게 환원되었다.
“이제 곧 시즌 4를 시작할 예정이에요. 지금까지는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만화 콘셉트로 담아냈는데 새로운 시즌에는 사진과 영상으로 만들어보려고요. 많은 문과생이 문생원을 보면서 자신의 전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대부분은 전공 공부의 중요성을 직업적 측면에서만 평가하잖아요. 하지만 넓게 보면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사진 = 김기남 기자
phn0905@hankyung.com
< 저작권자(c) 캠퍼스 잡앤조이,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관련뉴스